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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일천번제의 원형과 본질은?

물빛향기 2013. 8. 22. 21:35

 

 

 

  온전한 일천번제의 원형과 본질은?

 

 

 

 

 

 

 

    왕상 3:4에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다는 기록의 말씀으로 일천번제를 놓고 제물을 일천일 동안 매일매일 드렸다고 주장한다. 또는 제물을 일천일 동안 한 마리씩 죽인 것이 아니라 제물 일천 마리를 한꺼번에 죽인 것이라고 주장을 하여 서로 자기의 주장이 맞는다고 역설한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 안에서 일천번제 새벽기도회를 실시한 교회가 상당히 많으며 서울 양천구 모 교회는 일천번제 기도운동본부를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외에 다수 교회와 기관에서 일천번제라는 제목아래 기도회를 실시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자적인 해석에 따라 하는 것에 대해 반론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올바른 의미를 알고 실행으로 옮겼으면 염원으로 글을 써본다. 일천번제는‘엘레프 오로트’(tAl[o @l,a)로서“일천번제들”로 번역해야 한다. 엘레프(@l,a,) 는 히브리어의 맨 첫 자로‘황소, 배우다, 멍에를 메우고 길들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숫자의 의미는 일도 되지만 일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횟수와 일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계시문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은 길들여지지 않은 황소와 같은 짐승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지기 위해서 배우는 것부터 시작이 된다. 말씀을 배우므로 하나님에게 길들여지며 인식하게 되고 분명하게 알아가게 된다. 단순히 예수를 믿고 천당 가는 식의 기독교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곧 자신의 내면이 짐승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가 밭을 가는 데는 코를 뚫고 멍에를 메고 길이 들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짐승 같은 인간은 말씀의 멍에를 메고 말씀에 길들어져야 자신의 마음 땅인 내면인 옥토로 잘 갈게 된다.

 

 

   히브리어 철자는 23자로 되어 있다. 첫 자는 ‘엘레프’(@l,a)배우는 것이요 마지막 자는 ‘타우’(ו?) 십자가, 목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어져 배웠으면 계시문자 22자를 통과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목표, 십자가에서 짐승의 속성을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길들어지는 만큼 육의 속성이 깨뜨려지고 불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다.

 

 

   히브리어에 먹는다는 말이‘아칼’인데‘먹는다, 전적으로 불태워 버리다’라는 뜻이다.“먹는다”는 말은 익히고 적용하는 것을 배운다는 말이다. 배운다는 말과 먹는다는 말은 같은 맥락이다. 먹는 것은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배우는 것은 시간이 정해지지 않는다. 일평생 시도 때도 없이 배워야한다. 말씀을 지식으로 배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익히고 적용하며 길들여져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고 빗나가는 육의 속성을 자르고 깨뜨리고 불살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나라로 가는 과정이며 십자가 길이다. 이 멍에를 메고 십자가 길을 가는 것은 죽기 위함이다. 내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생명 안에서 영생하고자 함이다.

 

 

  이와 같이 일천이라는 말은 배우고 길들여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시간적인 개념의 천일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평생토록 배워야 하는 나의 사는 날(헤아릴 수 없는 숫자)인지를 독자들이 판단하기를 바란다. 세상의 날짜로 천일만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전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더듬어서 찾아 헤맸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목석에도 절을 해보고 신을 만들어서 우상을 섬겨왔다. 그래서 샤머니즘에서부터 출발된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길을 모르는 인간은 길을 찾기 위해 영혼의 미아가 되어 방황하였다. 이런 모습들이 기독교 안에서 팽배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처음 기독교가 시작된 이스라엘도 샤머니즘을 묻어왔고 완벽함을 자랑하는 유럽과 미국마저도 샤머니즘에 묻어 있다. 샤머니즘만이 아니라 로마 문화와 헬라사상과 철학 등 각종 이방종교에 물든 기독교가 한국으로 들어와서도 한국적인 샤머니즘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기독교의 명맥을 이어온 것이 대단한 것이다.

 

 

  사실은 초대교회부터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 창 1:2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차있는 깊음의 무저갱에 갇혀있어 올바른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력으로 이 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이것을 알리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며 올바르게 전달하려고 무수한 노력을 한 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그 높은 뜻인 빛을 말씀을 통해 배우고 마음 땅에 받아드리기 전에는 무저갱의 옥에서 빠져 나오는 구원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무저갱의 늪 속에서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가 자포자기 상태에서 안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의 습성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을 거쳐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 무엇인가? 무저갱의 옥에서 구원해내시고자 말씀을 주신 것이 사랑이다. 이러한 무저갱의 옥을 지옥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고 생각하여 만들어 버렸다. 그러한 지옥의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와 말씀이 없는 상태가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말씀을 배우지 아니하면 인간의 마음토대에 빛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이신 말씀을 배우지 아니하면 인간의 마음토대의 불합리한 육의 속성은 깨뜨리고 소멸시켜 나갈 방법이 없다. 내 마음토대의 무저갱에 갇혀 있는 육의 속성을 깨뜨리고 소멸시킨 상태가 일천번제다.

 

 

   배우고 자르고 깨뜨리고 반복된 익힘의 훈련을 통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단계가 일천이라는 말이다. 마치 무술의 경지에 올라간 것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득도를 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이나 천사처럼 동등하게 되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여기서 착각하여 잘못된 데로 빠져버리고 만다.

 

 

  오로트(tAl[) 올라가는 것들, 번제들을 뜻한다. 제물을 죽여서 각을 뜨고 불에 태워서 그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자기의 죄를 위하여 자신이 죽는 것 대신에 짐승이 죽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그러나 짐승을 죽이면서 나대신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짐승의 속성을 죽여서 불태워야한다.

 

 

  그래서 구약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이 너무나 많다. 신약에서는 짐승을 잡지 않는다. 하지만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어린 양이 되어주셔서 무저갱에 빠져 있는 우리와 함께 죽으셨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믿어질 때 무저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계 6:9-11에는 나 하나 죽기를 기다리신다고 하였다. 짐승의 속성이 불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들에게로 올라가 주님과 인간의 마음토대가 하나로 되기를 기다리신다는 말씀이다. 나 하나가 죽고 불태워져야 기다리시는 수가 채워진다. 이것이 바로 일천번제의 원형과 본질인 것이다. 내 입장에서 가 아니라 주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일천번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오기를 원한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죽이며 육의 속성을 불태우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발걸음을 좌우로 빗나감 없이 정확하게 걸어오라고 하셨다. 이것이 일천번제로 나아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완성된 마음 땅이 되었을 때가 온전한 일천번제다.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 땅이 이루어지게 되는 때는 일천번제가 이루어지고 나서부터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이준호목사

(창골산 칼럼니스트)

ljh418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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