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시(詩) 뜨락

난초를 더 주세요 ㅡ 김이듬

물빛향기 2021. 1. 1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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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를 더 주세요 - 김이듬

엄마가 떠날 때 내가 엄마를 불렀을 때 그녀는 트렁크를 들고 현관문을 여는 찰나였다 이 층 계단에서 나는 뛰어 내려왔다 넘어졌다 몇 계단을 구르고 보니 동네 도랑가에 있었다 내 이마에는 그때 생긴 흉터가 있다 웃기지 마라 트라우마는 없다 비상구다 평소에는 앞머리로 커튼처럼 가리고 다니지만 기분 좋은 날엔 향기로운 동양란처럼 생긴 흉터를 밀고 내 마음의 정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엄마는 히아신스를 만지고 있다 그녀는 외국 물건을 좋아했다 우리는 같이 파랑새를 부르고 장미과자를 먹고 들장미 덤불을 손질한다 비 오는 밤 죽은 엄마가 내 이마를 쓰다듬고 내 이마로 잠입하는 순간 나는 신열이 나서 아름답고 몽환적인 자장가를 듣는다

- 시집<히스테리아>(문학과지성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