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4

여행의 이유(김영하) - 9

여행의 이유(김영하) - 9 ♣에세이 필사 8일차 노바디의 여행 돌아보면 내 인생은 온갖 중독과의 싸움이었다. 십오 년을 피우던 담배를 끊는 데 겨우 성공한 것은 서른세 살 때였다. 그전까진 침대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다. 『빛의 제국』을 쓰던 2006년 무렵에는 매일 밤 위스키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만들어 마셨다. 그래야 잠이 들었다. 이 버릇을 고치는 데에도 또 몇 년이 걸렸다. 컴퓨터 게임들에도 쉽게 중독되었다. 이십대에는 중국의 고전 『삼국지』를 기반으로 만든 롤플레잉게임 ‘삼국지’에, 몇 년 후에는 일상생활을 그대로 재현하는 ‘심즈’, 전략 시뮬레이션게임인 ‘스타크래프트’에도 빠졌다. 청소년기에는 만화책이나 무협지에 과몰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중독과 싸우면서도 나는 1996년부터 지..

여행의 이유(김영하) - 7

♣ 에세이 필사 6일 차 그림자를 판 사나이 밤샘 시위자들이 설치한 각양각색의 텐트들로 뒤덮인 공원 구석구석엔 답지한 기부 물품들이 곳곳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텐트에선 대마초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수시로 피자가 배달되었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하루 종일 피자를 먹었다. 나도 피자 한 조각을 배급받고 사방에 쌓여 있는 음료수 상자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공원 한구석에는 도서관도 있었다. 사람들이 기부한 책에 OWS(Occupy Wall Street)라는 장서인만 찍어 보관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아무 절차 없이 책을 대출할 수 있었다. 통일된 조직 체계는 없었지만 주코티 공원은 자생적으로 작은 도시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텐트들이 모여 있는 주거지역과 토론과 회의가 열리는 일종의 아고라 같은 공적 공..

여행의 이유(김영하) - 4

♣ 에세이 필사 3일차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언덕 위에는 봉분들로 보이는 부드러운 융기들이 잔디로 덮여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경북 고령이나 부산 동래의 가야 고분군들이 바로 떠올랐다. 그리고 끝없이 이동하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험한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인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니 인터넷 시대가 되면 수요가 줄어들 거라던 여행은 오히려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세계관광기구 통계에 따르면 인터넷이 아직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1995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5억 2천만 명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났으나 2..

여행의 이유(김영하) - 3

♠에세이 필사 2일차 오직 현재 ‘여행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라는 질문은 작가라면 한번쯤 받아보는 것이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억이 나는 거의 없다. 영감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나 나의 모국어로, 주로 집에 누워 있을 때 왔다. ‘작가라 좋으시겠어요. 세계 어디에서도 쓸 수 있잖아요?’ 같은 말도 자주 듣는다.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쓸 수는 있다. 『검은 꽃』은 과테말라의 안티구아에서 앞부분을 썼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뉴욕에서 시작해 거기서 끝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나는 많은 나라와 도시를 여행했고, 때로 한곳에서 몇 년 동안 머물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낸 스무 권이 넘는 책들 중에서 단 두 권만이 모국어로의 영토 밖에서 쓰였다. 심지어 여행기도 집으로 돌아와 썼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