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등산 여행/걷 기 얘기

진주성

물빛향기 2016. 12. 12. 21:50

진주성 걷기

(2016년 11월 28일, 3.65km 약 1시간 37분 소요)


광양버스터미널에서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 약 1시간 30분만에 도착하다.

터미널에서 진주성 가는 길에 진주교를 좌측으로 보면서 진주성으로 가다.


진주교




진주성(晋州城)


진주성은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주성 하면 우선 임진왜란

3대첩(진주대첩, 한산대첩, 행주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과

의기 논개를 떠올리게 된다. 진주성이 호국충절의 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진주대첩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공해 올 때 진주목사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의 힘을 합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청사에 우뚝한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여덟달 뒤인 1593년 6월, 크게 패한 왜군이 설욕을 노린 10만여 명으로 재침하자

 7만 민,관,군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하다.

이에 진주사람들은 성 안에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을 세워 진주성에서

목숨을 바친 그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있다.


진주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의기 논개이다.

논개는 왜군의 재침으로 성이 무너지자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왜장을 유인해

강물에 몸을 던져 충절을 다했다.


성곽둘레는 1,760m, 높이는 5~8m이며, 성안에는 14점의 지정문화재 등 각종 유적이 있다.



촉석루(矗石樓)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년)에 김지대가 창건한 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까닭'에 누(樓)의 이름을 촉석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촉석루기,하륜] 그리고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로서 장원루라고도 부른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국보 제276호로 지정되었지만 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 시민들이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 성금으로 1960년에 옛 모습을 되찾았다.


촉석루 현판 중 북쪽의 것은 영조 때의 명필 송하 조윤형이 썼으며, 남쪽은 유당 정현복,

남장대는 은초 정명수의 글씨이고,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이라는 글씨는 청남 오제봉의 글씨이다.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


의암사적비는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어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 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어우야담>에 의해 논개의 순국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진주의 사민들은 정식(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비를 세웠고 경상우병사 남덕하(1688~1742)가 비각을 세워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논개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니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공북문(拱北門)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와 진주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이다. 

공북문의 공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한다.


따라서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공북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 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구골나무

물푸레나무과에 속하고, 원산지는 일본과 대만이면서 관상용으로 사용된다.

개화시기는 10~12월이고, 결실기는 다음해 4~5월이다.



겨울으로 접어 드는 시점에 잠시 따뜻한 날씨에 개나리꽃이 피어있었다. 그날은 좀 쌀쌀한 날씨였는데,,,



서장대(西將臺)


진주성 서문의 지휘장대이다.

[여지도서]에 회룡루로 적고 있는데 규모는 작았지만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서장대는 허물어진 것을 1934년 독지가 서상필씨가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목조기와 집이다.


원래 서장대의 현판은 없어졌고, 지금의 현판은 은초 정명수의 글씨이다.


마지막 단풍이 절정이 이룰고 있다.



진주성 포루(砲樓)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이다.

선조 40년, 1607년 병사 김태허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 12좌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의 경상우도병마절도영조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했다.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했다.




북장대(北將臺)


북장대는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로 진남루라고도 부른다.

광해군 10년(1618년) 남이흥이 중건했으며 조선 중기의 다락집 형으로 후대 군사시설의 모범이 되었다.

북장대는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낭떠러지 밑의 성밖은 물론이고

성내와 외성에 포진한 병사까지 지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영남포정사 문루는 진주성에 현존하는 최고의 건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그 전신은 망미루이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2층으로 신축했다.


영남포정사 문루는 진주목시대에는 진주성 내성의 관문이었고, 고종 32년(1895년) 관찰부가 설치될 때는 진주관찰부의 관문으로 영남의 정사를 선포하는 행정중심지를 뜻하는 말로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1896년 진주관찰부가 경상남도청으로 바뀌면서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며 1925년 도청 소재지가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 역할을 했다.








진주성 안에서 진주교를 바라보면서, 이제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한번 찾아올 수 있을지,,,



진주성을 한바퀴 걷고 다시 터미널에 도착하여 통영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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