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바다 - 김진래
섬을 드나드는 빛은 비스듬히
아침의 빛은 멀리서 찾아오고
저녁의 빛은 느리게 물러가네.
하루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지 않고
어둠이 빛을 걷어가지 않고
어둠이 포개지는 빛이 비스듬히 기울 때
풍경은 멀고 깊은 안쪽을 드러낸다.
빛은 공간에 가득차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빈 것으로 채워가면서 명멸하네.
만조의 바다 위에 내리는 빛은
저 먼 수평선 위에 더 찬란하다.
빛들의 나라로 들어가면
빛은 더 먼 나라에서 빛나고
빛의 나라는 무진강산이라
썰물 때,
어선들은 갯벌에 얹혀있고,
신산한 몸통을 햇볕에 널어놓고
드러내 놓고 빛 속으로 풍화되어
빛이 어선에 닿으면
어선 몸통의 물기가 마르면서 바람에 날아간다.
조금씩 빛의 가루가 되어
공기 속으로 흩어져 환영을 이룬다.
어선들은 남루하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갑판 위에
필요 없는 물건은 한 점도
실려 있지 않네.
모든 어로 장비, 잡동사니들은 작업순서
인간 육체의 공학적 기능에 맞춰서
제자리에 정확히
어선의 헝클어진 모습은
무질서이며 시원적 삶의 경건성이다.
-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으면’ p.63~65,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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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明滅) : 껴졌다 꺼졌다 하다. / 불빛 따위가 켜졌다 꺼졌다 함.
무진(無盡) : 끝이 없을 정도로 매우.
풍화(風化) : 지표를 구성하는 바위, 돌, 따위가 햇빛, 공기, 물 등의 작용으로 점차 파괴되고 부서지는 현상.
환영(幻影) : - 공상이나 환각에 의하여 눈앞에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 이루지 못할 희망이나 이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시원적(始原的) : 어떤 것이 시작되는 맨 처음의 상태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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