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 최영미
너의 인생에도
한 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 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 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 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 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비, 1994, 초판 / 창비, 2015, 개정판)
시집 '창비'에 발표된 최영미의 시입니다. 그녀의 최초 시집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아주 유명했답니다. 서울대 출신에 학생 운동도 했었고 재작년에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 "괴물(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을 발표하여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위 시의 제목에 나오는 아도니스(Adoni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핸섬남입니다. 근데 불행히도 그는 아버지인 왕 키니라스와 키니라스의 딸 스미르나와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엄마는 누나도 되기도 하지요. 이 후 아도니스는 자라면서 두 여신과 사귀게 되고 사냥을 무척 좋아했는데 사냥에 나서 멧돼지의 공격으로 죽고 맙니다.
이때 아도니스가 흘린 피에서 피어난 꽃이 아네모네...
이 시와 그리스신화의 아도니스가 뭔 관계가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래도 시의 내용은 마음으로 많이 와 닿습니다.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내 인생에도 그런 바람 몇 번 불었는데 그때 내 손을 잡아 준 이가 생각납니다.
위 시는 헤어진 남자와의 감정을 담아 쓴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아도니스..
그를 위한 연가..
스스로의 마음을 쏟아내는 눈물 같기도 하네요.
단상)
나의 인생에도 한번 쯤 휑한 바람이 불었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밤하늘에 달무리질 때처럼, 그녀는 나를 지나갔다.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기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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