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 보고서야 알았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어머니 볼에 문질러보네. 안감이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이었네.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네.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네.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송이 몇 점 다가와 물드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꽃물이 똑똑 떨어지네.
눈덩이만 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일생을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그 드물고 정하다는*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나니.
- <현대시>2003년 11월호 /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문학과 지성사, 2009)
* 백석의 시 중에서
<남신의주 유도 박시봉방>중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 지금도 가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 뵐 때마다 좋은 것 사다 들이면,
이제는 손자 손녀들에게 주기 바쁘다.
그런 부모님을 뵐 때마다 너무나 죄송하다
'독서이야기 > 익어가는 하루(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년회 - 황인숙 (0) | 2020.02.16 |
---|---|
지난 발자국 - 정현종 (0) | 2020.02.15 |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0) | 2020.02.13 |
사람의 일 - 천양희 (0) | 2020.02.12 |
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0) | 2020.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