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물빛향기 2020. 2. 14. 21:19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 보고서야 알았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어머니 볼에 문질러보네. 안감이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이었네.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네.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네.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송이 몇 점 다가와 물드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꽃물이 똑똑 떨어지네.
눈덩이만 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일생을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그 드물고 정하다는*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나니.


   - <현대시>2003년 11월호 /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문학과 지성사, 2009)


   * 백석의 시 중에서
<남신의주 유도 박시봉방>중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  지금도 가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 뵐 때마다 좋은 것 사다 들이면,

이제는 손자 손녀들에게 주기 바쁘다.

그런 부모님을 뵐 때마다 너무나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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