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신영복) 읽고 발췌 - 9
2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12. 푸른 보리밭 (p.205~220)
호세 리잘(Jose Rizal)의 「마지막 인사」처럼 한 편의 서정시를 준비하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는 총살형이었습니다. 어두운 형장의 교수형보다는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가 그리도 간절히 원했던 총살형, 찬란한 햇빛 속에서 땅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최후가 위로라면 위로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 p.210
정치란 무엇인가? 적어도 정치권력이 민주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는 아니었습니다. 정치란 대적(對敵)의 논리로 구축되어 있지만 내면에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조건이 되고 있는 이를테면 권력 집단 간의 상생과 상극을 생리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중략) 스스로를 냉혹한 인간으로 연출함으로써 피의자를 몸서리치게 하는 수사 기법은 한 인간에 대한 절망을 넘어서 정치권력 그 자체에 대한 소름끼치는 공포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이러한 절망의 끝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 p.217
무기징역을 시작하면서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로 들어서는 막막함에 좌절했습니다. 동굴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동굴의 바닥은 어떤지, 그리고 동굴에는 어떤 유령들이 살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암담한 심정이었습니다. - p.218
추억은 과거로의 여행이 아닙니다. 같은 추억이라도 늘 새롭게 만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추억은 화석 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단히 성장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언제나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 p.219
13. 사일이와 공일이 (p.221~249)
징역살이는 하루하루가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만나는 상념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 상념들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까웠습니다. 어디다 적어 두고 싶었습니다. 유일하게 허용된 공간이 집으로 보내는 엽서였습니다. 엽서에 적어서 집으로 띄우기 시작했습니다. - p.222
『감옥으로부터의 사색』ㅡ 징역살이 자체는 혼란스럽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투고 싸우고 쫓기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엽서에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가족들이 최종적인 독자였기 때문입니다. 반듯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가족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였습니다. - p.224
왕따는 내가 변화함으로써 벗어나게 됩니다. 내가 변화한다는 것이 바로 동료 재소자들의 경험을 목발로 삼아 서툰 걸음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참담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인생사가 나를 적시고 지나갑니다.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부모 만나서 그런 인생을 겪어 왔다면 지금 똑같은 죄명과 형기를 달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다리가 목발을 닮아 가는 과정이며 나 자신의 변화이기도 했습니다. - p.229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참으로 먼 여정이었습니다. 이 여정은 나 자신의 변화였고 그만큼 나에게 성취감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슴까지의 여행이 최고점이고 종착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톨레랑스’, 프랑스의 자부심이며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윤리성이 바로 관용이기도 합니다. (중략)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가슴’이 공감과 애정이라면 ‘발’은 변화입니다. 삶의 현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 p.230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연금술사』에서 양치기 산티아고는 연금술의 기적을 믿고 찾아 나섭니다. 양 60마리와 가죽 물푸대 한 개, 무화과나무 밑에 깔고 잘 담요 한 장, 그리고 책 한 권이 전 재산입니다. 전 재산을 처분하고 바다를 건너서 이집트까지 고행을 계속합니다. (중략) 그 긴 유랑의 매 순간이 바로 황금의 시간이라는 선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변화와 개조 역시 그 과정 자체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 p.232
목숨 수(壽) = “사일(士一)이하고 공일(工一)이는 구촌(口寸)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노래의 의미를 알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사일이가 지식인이고, 공일이가 노동자라면 9촌간이며 촌수가 너무 멀다. 2촌 정도가 좋지 않을까. 지금도 그런 생각입니다. - p.234
자신을 개조한다는 것이 기술자가 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중략) 기술자보다는 일상적 언어와 정서를 바꾸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어렵습니다. (중략) 자기 개조는 자기라는 개인 단위의 변화가 아닙니다. 개인의 변화도 여러 가지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적 신뢰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변화를 ‘가슴’이라고 한다면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을 ‘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235
인간적 신뢰나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용 관계가 인간관계의 보편적 형식입니다. 고용 관계란 금전적 보상 체계입니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인간관계에 신뢰나 애정이 담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교도소의 인간관계란 금전적 관계도 아니고 명령과 복종의 권력 관계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인간적 바탕 위에서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예술입니다. - p.237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上限)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 p.239~240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p.243
만기가 없는 무기수의 경우는 그 하루하루가 무언가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가 깨달음으로 채워지고 자기 자신이 변화해 가야 그 긴 세월을 견딥니다. …… “인생은 공부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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