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신영복) 읽고 발췌 - 10
14. 비극미 (p.250~264)
교도소의 모든 재소자들이 그렇듯이 이름 없고 칭찬받지 못하는 수많은 민초들 중의 한 포기 풀입니다. ……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조용히 들여다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 속에 우주가 있습니다. 꽃 한 송이의 신비가 그렇거든 사람의 경우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누구나 꽃’입니다. 그 속에 시대가 있고 사회가 있고 기쁨과 아픔이 있습니다. (중략) 엑스트라와 주인공의 차이는 외모의 차이가 아닙니다. 엑스트라와 주인공의 결정적인 차이는 주인공은 죽을 때 말을 많이 하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엑스트라는 금방 죽습니다. 주인공에게는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죽을 때 그 사람들에게 말을 남깁니다. 엑스트라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죽습니다. 누구든지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면 빛납니다. - p.251
예술은 사물이나 인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합니다. 그 특징의 하나가 클로즈업하는 것입니다. 야생화 한 송이를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유심히 주목하면 하찮은 삶도 멋진 예술이 됩니다. (중략) 예술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우리를 깨우치는 것 중에서 가장 통절한 것이 비극(悲劇)입니다. 비극은 모든 나라의 문하 전통에서 극화(劇化)되고 있습니다. 예술 장르에서 비극은 부동의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 p.252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한매(寒梅), 늦가을 서리 맞으며 피는 황국(黃菊)을 기리는 문화가 바로 비극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화입니다. 우리가 비극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세상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중략) ‘아름다움’이란 뜻은 ‘알다’ ‘깨닫다’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세계와 자기를 대면하게 함으로써 자기와 세계를 함께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불우한 처지의 생명을 위로하기보다는 그것을 냉정하게 직시하게 함으로써 생명의 위상을 새롭게 바꾸어 가도록 합니다. 그런 뜻에서 ‘아름다움’은 우리가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성찰’, ‘세계 인식’과 직결됩니다. - p.253
감옥은 : 첫째, 사회학 교실 - 우선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바깥에 있었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p.253)
둘째, 역사학 교실 - 감옥을 역사학 교실이라고 하는 이유는 역사 현장의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기 때문입니다. (중략) 역사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처럼 생동적입니다. 역사책 속의 역사와는 사뭇 다릅니다. 화석화된 역사가 아니라 피가 돌고 숨결이 느껴지는 살아 있는 역사가 됩니다. 역사학의 생명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없는 역사는 ‘빈 자루’입니다. 세울 수 없습니다. 사람을 통한 역사의 생환이 중요합니다. (p.257)
셋째, 인간학 교실 - 우리가 가장 많이 공부하는 것이 ‘사람’ 공부입니다. 인생의 70%가 사람과의 일이라고 합니다. (중략) 사람이란 많기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이 복잡하기도 하고, 보여주는 모습도 천의 얼굴입니다. - p.255~258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오만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무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순수한 어떤 것을 상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왜소한 인간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세상의 끝 동네인 여기서는 제발 잘난 척하지 말자’는 인간적 호소였습니다. - p.261
얼어붙은 새벽하늘을 찢고 고단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겨울 새벽의 기상나팔은 ‘강철로 된 소리’입니다. 우리가 비극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비극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작은 사랑(warm heart)에서가 아닙니다. 비극이 감추고 있는 심오한 비의(秘意)를 깨닫는 냉철한 이성(cool head)을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교도소는 변방의 땅이며, 각성의 영토입니다. 수많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있고, 성찰의 얼굴이 있고, 환상을 갖지 않은 냉정한 눈빛이 있습니다. ‘대학(大學)'입니다.
- p.264
15. 위악과 위선 (p.265~296)
『자연』=「벌레들의 속임수」 : 벌레들의 문양이란 대체로 작고 힘없는 벌레들이 살아가기 위하여 도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소자들의 문신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입니다. - p.265
바늘을 실로 챙챙 감고 바늘 끝만 조금 남겨 둡니다. 실 감긴 바늘을 먹물에 적시면 실이 먹물을 머금고 있다가 바늘 끝으로 흘려보냅니다. 바늘 끝으로 피부를 찔러서 살갗 밑으로 먹물을 넣습니다. 살 속에 먹물이 들어가면 글자가 번져서 희미해집니다. 피부의 살갗만 살짝 들어서
되도록이면 먹물을 얕게 넣는 것이 기술입니다. (중략) 교도소 재소자들의 문신은 자기가 험상궂고 성질 사나운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악(僞惡)’입니다. ‘위선(僞善)’과는 정반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먹이 있거나 성질이 있어야 한다는 광범한 합의가 저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 p.266
위악이 약자의 의상(衣裳)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僞裝)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닙니다. - p.268
테러는 파괴와 살인이고 전쟁은 평화와 정의라는 논리가 바로 강자의 위선입니다.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은 강자의 테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모순된 조어가 버젖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 p.270
사쿠라와 무궁화를 비교. : 사쿠라 꽃을 봐라. 구름처럼 하늘 가득히 피었다가 미련 없이 산화하지 않느냐. 무궁화는 시들어서 더 이상 꽃도 아니면서 벌레와 진드기까지 잔뜩 껴 붙은 채로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지 않은가. (중략) 무궁화는 덕(德)이 있는 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벌레와 진드기까지 함께 살아가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생각하면 꽃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꽃은 사람들의 찬탄을 받기 위해서 피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피는 것도 아닙니다. 빛과 향기를 발하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한 것입니다. 시들어서 더 이상 꽃이 아니라 하지만 그 자리에 남아서 자라는 열매를 조금이라도 더 보호하려는 모정(母情)입니다. 꽃으로서의 소명을 완수하고 있는 무궁화는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는 말을 참으로 아름답게 쓰고 있네요.
약자의 위악과 강자의 위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약자의 위악은 잘 보이지만 강자의 위선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보지 못합니다. - p.273
감옥은 형벌의 현장이면서 사회의 축소 모델입니다. 춘하추동이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감옥은 물론 범법자들을 물리적으로 격리 구금하는 시설입니다. 그러나 미셸 푸크(Michel Foucault)는 감옥을 다르게 정의합니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정치적 공간’입니다. - p.274
귓구멍들을 경멸하고 공부와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의 가치를 평가 절상하는 그들의 계급의식이 결국은 사회의 제약(limitation)이라는 일련의 시스템 속에서 좌절됩니다. - p.275
인간에 대한 애증을 고르게 키워 가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노력이 부족함을 탓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공부는 우리의 동공을 외부로 향하여 여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심화하는 인간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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