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신영복) 읽고 발췌 - 11
16. 관계와 인식 (p.277~286)
대상과 자기가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거나 운명의 핏줄로 맺어짐이 없이, 즉 대상과 필자의 혼연한 육화(肉化)없이 대상을 인식하고 서술할 수 있다는 환상, 이 환상이야말로 정보 문화와 저널리즘이 양산해 낸 허구입니다. (중략) 참된 인식이란 관계 맺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 p.278
잘 안다는 것은 서로 ‘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관계 없는 사람에게 자기를 정직하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노래 가사에도 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대단히 철학적인 가사입니다. 잘 알기 위해서는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면 애초부터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가 애정의 수준일 때 비로서 최고의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애정은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바로 저널리즘이 양산하고 있는 위장된 객관성입니다. 애정이 없으면 아예 인식 자체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애정이야 말로 인식을 심화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 p.279
모든 인식은 그 대상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발견해 내는 것에서부터, 즉 관계를 자각하고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 - p.280
「관계와 인식」 : 인식은 그것이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이든 가장 밑바탕에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인식의 근본입니다. (중략) 우리는 지금 ‘관계’ 담론을 인식의 문제, 사람의 문제로 논의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관계’는 ‘세계’의 본질입니다. ‘세계는 관계입니다.’ 세계는 불변의 객관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양자 물리학이 입증하고 있는 세계상입니다. 세계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뉴턴 시대의 세계관입니다. 입자와 같은 불변의 궁극적 물질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 p.281~282
계급과 경제적 조건은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빵 없이 살 수 없지만, 빵만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경제적 동물이 아닙니다. 삶은 광범위한 관계망 속에서 영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강의도 관계와 인식의 문제에서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 p.283
나를 보다 좋은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관계야말로 최고의 관계입니다. - p.284
대학의 존재 이유입니다. ‘오늘’로부터 독립한 사유 공간, 비판 담론 ․ 대안 담론을 만드는 공간이 바로 대학입니다. 지식인도 그 사회적 입장에 있어서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략) 사회운동 활동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운동은 예술적이어야 합니다. 수많은 악기가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와 같아야 합니다. - p.286)
17. 비와 우산 (287~296)
「함께 맞는 비」- 신영복 교수의 붓글씨 작품.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게 비를 맞는 것이다.” = “돕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중략) 징역살이는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됩니다. 산다는 것이 어차피 이것저것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주고받는 일의 직접 당사자나 되거나 또는 지척에서 겪습니다. - p.287
물질적 도움보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중략) 돕는 자와 도움 받는 자를 지척에서 관찰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 처지가 다르면서 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 p.290
범틀은 교도소 은어입니다. 돈을 많이 쓰거나 편지, 면회가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는 개틀입니다. 그런데 처음 한 봉지씩 나누어 주고 난 후로는 일절 없습니다. 건빵을 사서 자기 혼자만 먹었습니다. 혼자 먹기는 했지만 비교적 양심적으로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잠든 밤중에 조용히 이불 속에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습니다. 건빵을 먹어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소리 안 나게 깨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 p.291
‘함께 맞는 비’는 돕는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또 물질적인 경우에도 그 정이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중략)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돕는 것이지 있는 우산을 접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비를 맞으며 걸어간 경험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혼자 비를 맞고 가면 참 처량합니다. 그렇지만 친구와 함께 비 맞으며 걸어가면 덜 처량합니다. - p.295~296
18. 증오의 대상 (p.297~305)
제일 큰 방이 3.75평입니다. 상당히 큰 방이라고 하지만 그 방에 많을 때는 20명이 잡니다. 당연히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합니다. 칼잠으로 팔이 저리면 몇 사람이 의논해서 한꺼번에 돌아눕기도 합니다. 감방 인원이 적을 때는 반듯하게 누워서 잡니다. 그것을 ‘떡잠’이라고 합니다. 행복한 잠자리입니다. - p.297
무더운 여름에 옆 사람과 살을 맞대고 붙어서 잔다는 것은 고역입니다. 당연히 옆 사람이 미워집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도 옆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중략) 지옥 같은 밤이 지나고 기진한 몸을 아침에 일으키면 어젯밤의 증오도 함께 사라지고 똑같이 기진맥진한 옆 사람에게 민망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증오는 옆 사람 때문이 아니라 ‘감옥’과 ‘좁은 잠자리’ 때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는 합니다. - p.298
겨울 징역살이가 그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옆 사람의 체온과 이처럼 잔잔한 인정이 느껴지는 것임에 비하여 여름철은 더위와 증오에 시달립니다. 낮 동안에 감방의 벽돌 벽이 땡볕에 달구어질대로 달구어져서 감방은 마치 가마 속 같습니다. 밤 두세 시까지 잠들지 못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36도의 옆 사람 체온을 안고 자야 하는 여름밤의 칼잠자리는 그야말로 형벌입니다. (중략) 어느 감방이든 감방마다 ‘싸가지 없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씩 있습니다. 싸가지 없는 사람이란 무례하고, 경우도 없고, 하는 짓이나 하는 말 어느 것 하나 밉지 않은 구석이 없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사회라면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징역살이는 다른 곳으로 피할 수 도 없습니다.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이 주먹다짐으로 혼찌검을 내기도 합니다.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어쨌든 교도소에는 어느 감방이든 그런 사람이 꼭 한 명씩 있습니다. - p.300~301
여러 사람을 보내고 난 다음에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처한 힘든 상황이 그런 표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당사자인 그에게 그만한 결함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가 처한 혹독한 상황이 그런 공공의 적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여러 사람을 보내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 p.301
겨울은 정신을 한없이 맑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은화(銀貨)처럼 맑아지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는 ‘철학’의 계절이었습니다. (중략) 겨울 독방은 명상과 철학의 교실입니다. 복잡한 혼거 방에서 여름 내내 쌓이고 쌓였던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하나하나 정리합니다. - p.303
우주는 하나의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이 폭발한 것이 빅뱅입니다. 지금도 우주는 확장되고 있다고 합니다. 137억 년 전에는 나와 여러분은 물론 나무, 별, 지구, 은하수가 전부 한 개의 점이었습니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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