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시인 -- 최영미
그는 걷는다. 타락한 도시의 시궁창에 코를 박고
달콤한 향수에 숨은 지독한 사연들,
방금 구워진 소문들을 염탐하고
백화점 스카이라운지에 웅크린 권태와 일요일의 경멸,
성공하지 못한 계산과 자포자기의 살의(殺意)를 목격하는
그는 불행과 고통의 친구이며
망설이는 자들의 이웃,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후원자.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며 항구마다 애인을 만들고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연인의 품에서 잠들기도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벌써 고독이 그리워
창문을 열어제낀다
시멘트벽에 흩어지는 빛과 바람을 모아
가난한 언어의 그물을 짠다
운이 좋아 그가 성공하면
푸른 창공을 가르는 한 줄기 영롱한 구름처럼
노래가 솟아오른다.
지상의 어느 보석도 그 앞에선 시들해질....
- 시집(이미, 2020개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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