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시(詩) 뜨락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물빛향기 2021. 6. 20. 20:50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무수히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난 멋 부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건네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고

해맑은 눈길만을 남긴 채 모두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굳어 있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 패했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 재즈가 넘쳐흘렀다

금연을 깨뜨렸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난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난 몹시도 불행했고

난 몹시도 엉뚱했고

난 무척이나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하면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 무척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영감님*처럼

말이지

 

(*프랑스 화가 겸 판화가 조르주 루오, G. Rouault 1871~1958)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2012100057 

 

阿Q의 시 읽기 〈49〉 이바라기 노리코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람들이 무수히 죽었다 /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하면 오래 살기로

monthly.chosun.com

 

'삶의 이야기 > 시(詩) 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날 시인 -- 최영미  (0) 2021.05.30
봄비 - 정호승  (0) 2021.04.04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 안명옥  (0) 2021.03.08
흐린 날이 난 좋다 - 공석진  (0) 2021.01.31
정말 사과의 말 - 김이듬  (0) 2021.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