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앞, 그 밤의 한 장면"
청하, 그 밤의 이름
— 편의점 야간 알바생의 기록
요즘 들어 밤이 참 길게 느껴진다. 사람 발길도 뜸해지고, 시계는 새벽 1시를 향해 가는데, 도로는 이미 잠든 것처럼 조용하다. 간혹 자동차 한두 대가 쌩하니 지나갈 뿐. 나는 그 소리에 잠깐씩 정신을 붙잡는다.
서울의 밤이라는 게 꼭 사람 같기도 하다. 무표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 감정을 품고 있는 얼굴.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나는 이 편의점의 야간을 지키고 있다.
그날 밤도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정리된 진열대, 커피 향이 옅게 남은 계산대, 그리고 멍하니 틀어놓은 라디오. 모든 게 느릿하게 흘러가던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띵 동 ~~
익숙한 소리였지만,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청하를 불렀다"
한 여인이 들어왔다. 얇은 코트를 걸친 모습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어깨에서 흘러내릴 듯한 그 코트는 바람을 전혀 막아주지 못할 것처럼 느슨했고, 그녀의 구두 소리는 묘하게 서글펐다. 차갑고 단단한 바닥 위로 툭툭 울리던 그 소리는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눈을 잠깐 마주쳤다. 나는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다. 그 짧은 시선이 전부였지만, 이상하게 그 눈빛은 꽤 오래 머물렀다. 슬픈 눈이었고, 어딘가 단념한 눈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이 지쳐 보였다.
"아무 말 없이 남겨진 이름, 청하"
그녀는 망설임 없이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유리문을 열고, 푸른 병 하나를 꺼냈다.
‘청하’.
그 맑은 이름의 술병을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처럼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2,500원이요.”
나는 계산하며 평소처럼 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작은 봉투에 병을 넣고는 다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나는 계산대 안쪽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밖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녀는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살짝 모으고, 두 손으로 병을 감싼 채,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건드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안쓰럽고, 조금은 걱정됐다.
뚜껑을 따는 소리가 안까지 들렸다.
그녀는 청하를 입에 댔고, 조용히 마셨다. 입술이 병을 살짝 물고,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청하… 청하…”
"서울의 밤, 누군가의 이야기가 흘렀다"
그게 단순히 술 이름을 부른 것만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누군가의 이름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름보다 더 오래 남은 무언가, 그리움, 후회, 혹은 잊지 못하는 기억의 파편.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은 마치 바람에 섞여 내게도 들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계산대 너머에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렸다.
그녀가 무슨 사연을 가졌는지는 몰랐다. 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홀로 청하를 마시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한 채, 이 고요한 도시의 구석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병을 반쯤 비운 뒤에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던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장면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속삭이듯 말한 그 한마디, “청하야… 잘 지내고 있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가 떠나보낸 사람은, 분명 그녀의 세계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존재였다.
"한밤의 구도 소리가 슬퍼 보일 때가 있다"
그녀는 결국 조용히 일어났다. 병은 비닐봉투에 조심스럽게 담겼고, 구두 소리가 다시 거리를 울렸고, 코트는 여전히 어깨를 감싸주지 못했고, 그녀는 혼자 걸어갔다. 차가운 서울의 밤길을 ~~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그렇게 오래, 깊이, 조용히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편의점 의자 하나가, 때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해주는 작은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그 자리에 앉는 사람들을 조금 더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청하’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 여인이 떠오른다. 그 밤, 그 이름, 그리고 그 눈빛, 나는 아직도 그녀가 잘 지내고 있기를, 조용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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