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오래된 기도 - 이문재

물빛향기 2019. 11. 14. 21:29

16)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동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어 마시기만 해도

 

   - 이문재 시집<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

 

 

 

===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행복을 위해 수고할 때도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새벽에 눈을 떠 내 시야에 들어오는

방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아내와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창문을 열고 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출근하려고 밖으로 나오니 신선한 새벽 공기가

내 폐부 깊숙이 들어오기만 해도

사람들의 활기찬 걸음거리를 보기만 해도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기도이며, 감사한 일이며,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살아있는 나의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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