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 3
서해
이 섬을 드나드는 빛은 비스듬하다. 아침의 빛은 멀리서 오고 저녁의 빛은 느리게 물러가서 하루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빛과 어둠은 지속되는 시간의 가루들을 서로 삼투시켜가면서 교차되는데, 그 흐름 속에 시간과 공간은 풀어져서 섞여 있다. 어둠에 포개지는 빛이 비스듬히 기울 때 풍경은 멀고 깊은 안쪽을 드러낸다. 빛은 공간에 가득 차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빈 것을 빈 것으로 채워가면서 명멸한다. 만조의 바다 위에 내리는 빛은 먼 수평선 쪽이 더 찬란하다. 그 먼 빛들의 나라로 들어가면 그 나라의 빛은 더 먼 나라에서 빛나고 있을 터이다. 그래서 빛이 나라는 무진(無盡)강산이다. (p.63)
썰물 때, 어선들은 갯벌에 얹혀서 그 신산한 몸통을 햇볕에 말린다. 어선은 그 뼈대를 모두 햇볕에 드러내놓고 빛 속으로 풍화되어간다. 빛이 어선에 닿으면, 어선 몸통의 물기가 마르면서 바람에 날아간다. 어선은 조금씩 빛의 가루가 되어서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환영을 이룬다. 어선들은 남루하고 지저분하지만, 그 무질서한 갑판 위에 필요 없는 물건은 한 점도 실려 있지 않다. 모든 어로장비와 잡동사니들은 작업의 순서와 인간 육체의 공학적 기능에 맞춰서 다들 제자리에 정확히 배치되어 있다. 어선의 헝클어진 모습은 가지런한 무질서이며 시원적(始原的) 삶의 경건성이다. (p.65)
■ 문장 분석
-서해바다 풍광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이 섬을 드나드는 빛은 비스듬하다.’, ‘아침의 빛은 멀리서 오고 저녁의 빛은 느리게 물러가서’ 서해바다를 비치는 빛에 관한 관찰기록 같습니다. 이 문장을 상상해보세요.
-서해바다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는 비유가 특이합니다.
-‘어둠에 포개지는 빛이 비스듬히 기울 때 풍경은 멀고 깊은 안쪽을 드러낸다.’ 비스듬하다에 주목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보세요.
-‘빛은 공간에 가득 차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빈 것을 빈 것으로 채워가면서 명멸한다.’ 현상을 사유가 고뇌가 가득한 문장입니다.
-명멸(明滅):불이 켜졌다 꺼졌다 함. 먼 곳에 있는 것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함. 나타났다 사라졌다 함.
-신산한, 몸통, 얹혀서, 뼈대, 말린다, 풍화, 환영, 남루 등 사용된 어휘가 풍성합니다.
-시원적(始처음 시, 原 근원 원, 的 과녁 적)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처음 시작되는. 또는 그런 것.
-‘어선 몸통의 물기가 마르면서 바람에 날아간다. 어선은 조금씩 빛의 가루가 되어서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환영을 이룬다.’ 아름다운 은유적 표현입니다.
-무질서/ 제자리 /남루한/ 경건성 등의 단어들이 주는 메시지가 있네요. 어선의 헝클어진 모습을 재해석한 글입니다.
-무진(無盡): 무궁무진의 준말
'독서이야기 > 에세이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 5 (0) | 2020.03.16 |
---|---|
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 4 (0) | 2020.03.16 |
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 2 (0) | 2020.03.15 |
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 1 (0) | 2020.03.14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임홍빈) - 11 (0) | 2020.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