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 1
라면을 끓이며
추위와 시장기는 서로를 충동질해서 결핍의 고통을 극대화한다. 추운 거리에서 혼자 점심을 먹게 될 때는 아무래도 김밥보다는 라면을 선택하게 된다. 짙은 김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콱 쏘는 조미료의 기운이 목구멍을 따라가며 전율을 일으키고, 추위에 꼬인 창자가 녹는다. 김밥과 라면을 함께 먹으면 어떤 맛도 온전히 살아남지 못하고, 뷔페 식당의 음식을 모조리 뒤섞어서 비빈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그걸 알면서도 라면을 먹으면서 김밥을 또 주문하니, 슬프다. 시장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p.16)
라면을 끓일 때, 나는 미군에게 얻어먹던 내 유년의 레이션 맛과 초콜릿의 맛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계장의 닭들과 사지를 결박당한 과수원의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들과 양식장에서 들끓는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는 36억 개 라면의 그 분말수프의 맛을 생각한다. 파와 계란의 힘으로, 조금은 순해진 내 라면 국물의 맛을 36억 개의 라면에게 전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눈을 팔다가 라면이 끓어 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라면의 길은 아직도 멀다. (p.31)
■ 문장분석
-『라면을 끓이며』 김 훈 산문집(문학동네, 2015)입니다.
-‘추위와 시장기’라는 두 상황을 놓고 결핍의 고통을 극대화시키고 있습니다.
-‘추운 거리에서 혼자 점심을 먹게 될 때’라는 표현이 추운 상황을 말해주는 문장입니다.
-‘아무래도 김밥보다는 라면을 선택하게 된다.’ 시장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으로 라면을 택합니다.
-‘짙은 김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콱 쏘는 조미료의 기운이 목구멍을 따라가며 전율을 일으키고, 추위에 꼬인 창자가 녹는다.’ 작가 김훈이 당시 얼마나 춥고 시장했는지를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추위에 꼬인 창자가 녹는다’는 표현이 이 문단의 방점을 찍고 있네요.
-에세이를 쓸 때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표현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라면을 끓일 때, ~~~~~~레이션 맛과 초콜릿 맛을 생각한다.’ (유년 시절 추억 소환합니다.)
라면을 끓일 때, ~~~양계장의 닭들과~~~~들끓는 물고기~~~~생각한다.(라면의 생산공정의 단계와 라면이 만들어지는 공업적인 과정을 표현합니다.)
라면을 끓일 때, ~~~36억개의 ~~~~생각한다.(36억개는 라면이 1년 동안 팔린 소비량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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