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읽기 (p.7~96)
통화현에서 가장 고운 게 무엇이겠니?
당장 떠오르는 것은 토끼의 새끼.
태에서 갓 나온 토끼는 못나고 조글조글하지만, 털이 마르고 살이 오르면 세상천지에 비길 것이 별히 없도록 고와진다. 흰 놈은 빨간 눈이 옥 같아서 곱고, 까맣거나 얼룩이 있는 놈은 까만 눈이 사람 같아서 귀엽다. 노란 놈들은 대개 생김새가 오밀조밀하여 딱히 어디가 제일 잘났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토끼란 새끼 때만 기특한 게 아니고, 다 자라서는 살과 털이 푸짐해 고마운 짐승, 토끼처럼 고맙고 고운 짐승이 또 없을 테다. 토끼의 가죽이 아니고서는 서간도의 모진 겨울을 버티기 어려웠을 게다. 무엇보다 갸륵한 점은 눈 감고 뜨기가 무섭게 새끼를 치는 것. 세상에 토끼 치면서 굶어 죽은 사람이 있으랴. 토끼 먹일 꼴을 베러 다니면서는 힘들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겨울이니 미리 토끼를 좀 잡아야 할 것이다. - p.13~14
주룡의 능청에 전빈이 슬며시 웃음 짓는다. 어둡지만 얼굴에 대고 있던 손이 하관의 움직임을 따라 들썩이므로 알 수 있다. 혼인이란 것은, 부부가 된다는 것은 동무를 갖는 일이구나. 죽어도 날 따돌리지 않을 동무 하나가 내게 생긴 것이구나. 주룡은 문득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중략) 날 밝기도 전에 닭이 운다. 주룡은 전빈이 깨지 않게 이부자리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와 매무새를 정돈한다. 조심스레 문과 문을 여닫으며 안방을 지나 정주간으로 들어간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아궁이를 돌보는 것이다. 겨우내 정주간에서 지내던 큰할머니와 조카들이 방으로 돌아가 거동이 그나마 좀 편해진 참이다. 걸어서 말려둔 관솔을 아궁이에 먹이자 숨을 죽이고 있던 불씨가 솥을 치며 자라난다. 물항아리는 절반쯤 차 있다. 밤사이에 낀 살얼음을 걷어내고 바가지로 물을 떠 솥에 붓는다. 감자와 보리에 쌀 한 홉을 섞어 솥을 걸 즈음에 큰동서가 하품하며 정주간으로 들어온다. 조왕간을 형님에게 맡기고, 주룡은 물동이를 이고 막 밝아오는 길을 더듬어 나간다. - p.29~30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숨을 돌리며 주룡은 제가 사는 동리를 내려다본다. 우물가에, 천변에 모여든 부인네들, 쏘다니는 행인들, 길 이리저리로 달음질치는 어린애들, 집들, 담들, 산비탈의 밭들, 성미 급한 사람들이 벌써 물을 대놓아 거울처럼 반짝이는 논들. - p.33
부부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멀어지지만, 부부가 함께 비밀을 품으면 오히려 정이 돈독해진다. 주룡은 이제 그것을 안다.
내쉬는 숨마다 새하얀 김이 된다. 아직 닭도 울기 전이다. 밤과 새벽의 경계에서 주룡이 전빈을 재촉한다. - p.37
부쩍 잠이 드물어진 큰할머니 귀에 소리라도 들릴까, 부부는 사립도 닫지 못하고 길을 나선다. 이따금 멈춰 서서 집을 돌아보는 전빈을 붙들어 앞세우는 것도 주룡의 일이다. 전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피붙이들이 잠들어 있는 집이 멀어질수록 아쉽고 그리운 마음이 전해질 것이다. 이렇게 떠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독립군에 가담한 자식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친일 단체의 눈 밖에 나서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무릇 대의에 투신한다는 것은 가정에는 죄를 짓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와 별개로 날 밝으면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기는 할 것이다. 전빈도, 주룡도 떠나고 그와 함께 큰할머니가 꼭꼭 숨겨두었던 금붙이도 몇 점 사라져버렸으니 그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리라. - p.40
옷이란 옷은 다 껴입고 나온 고로 아직까지는 버틸만하지만, 금 간 독에 물이 새듯 목덜미나 소매 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드는 것까지는 막을 도리가 없다.
날이 밝아오면서는 정수리만 햇볕에 점점 달아오른다. 훅훅 끼쳐오는 찬 바람은 여전하다. 얼어버린 코를 툭 치면 바스러져 없어지고 말 것 같은 생각에 주룡은 짧은 목도리를 얼굴 가운데로 추켜올려본다. 앞 목이 허전해지니 오래 그대로 있지는 못한다. -p.41
애초 하고 싶던 말과는 딴판이지만 이 또한 참말이다. 주룡은 공을 독차지하고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전빈이 언젠가 했던 말처럼 주룡이 독립을 원하는 것은 제 임자 때문이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 - p.65
주룡이 떠는 것은 난생처음 진짜 권총을 쥔 탓이다. 배 속에 품고 이동할 적에도 거북살스럽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손에 쥐고 있자니 더욱 진땀이 난다. 막상 방아쇠를 당길 순간은 오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광운은 주룡에게도 경험 삼아 총 한 정을 쥐어준 것일 게다. 어차피 당신은 쏠 필요 없으니 부담 갖지 말고 그저 손에 익게나 하라고. - p.66
노인은 뱀이 혀를 내두르는 것과 같이 싯싯거리는 소리로 말한다. 주룡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다. 주룡은 자루와 함께 쥐고 있던 권총을 고쳐 잡느라 잠시 지체한다. 그러는 사이 노인은 맞은편 벽에 걸려 있던 일본도를 낚아채 뽑는다. 늙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날랜 동작이다. 총이나 칼이냐 하면 총이 먼저라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긴 칼을 쥔 노인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주룡은 겁에 질린다.
신입조원 한 사람이 상황을 눈치 채고 총을 겨누며 달려온다. 눈앞에서 제 재산이 털리는 꼴을 본 노인은 두려울 게 없다. 노인은 괴상한 기합을 내지르며 칼을 번쩍 들어 올린다. 섬뜩한 안광 사이로 번개처럼 떨어지는 칼이 이상할 만큼 느리게 보이지만, 몸이 굳어 피하거나 막을 수 없다. 노인의 칼이 그리는 반호를 넋 놓고 바라보던 주룡의 눈앞에서 불꽃이 튄다.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굉음이 울린다. 저편에서 달려온 신입이 총을 들어 노인의 칼을 막은 것이다. 전빈을 비롯한 신입조원들은 그제야 소란을 알아채고 주룡 쪽을 바라본다. 그러자 모두 총을 내려놓고 캐비닛을 털던 참이라 당황하여 우왕좌왕한다. - p.68~69
주룡은 광운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손위 오라비 같은 사람이라 여겼고, 주룡의 생각에 광운은 저를 아픈 손가락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유독 떨어지는 대원을 손수 챙기고 보살피는 것은 그가 덕장이라는 증거다. 그가 늘 하는 말처럼 부인네들의 활약상이 중요하다는 생각 또한 주룡에게 더 많은 공을 들이는 연유의 하나일 것이다. - p.75
주룡 또한 일평생 부모 동기 봉양 잘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자의 가장 큰 덕이라 배워온 보통 여자다. 공공연히 주룡과 광운 사이를 손가락질하는 것은 주룡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거니와 눈 똑바로 뜨고 바로 곁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서방 전빈을 허섭스레기 취급하는 것이다. 동지라는 것들이 숙덕거리는 것을 주룡은 모르지 않는다. 저를 향한 손가락질에 그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 주룡이다. 본보기로 만만한 아새끼의 멱살을 잡을까 어떡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하는 것은 제 심정을 까맣게 모를 전빈 탓이다. 동료와 주먹다짐이라도 벌였다가 쫓겨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저야 아무리 급하게 들어온 졸병이라지만 제가 속한 부대는 어린애 장난 같은 것이 아니다. 나름의 군법이 있고 따라야 할 체계가 있다. 쫓겨나기를 면하더라도 전빈 얼굴에 먹칠이 됨은 다를 것 없다. 그러니 당장은 속없는 척 헤실헤실 웃을 수밖에. - p.76
문안 와준 장정들의 도움으로 전빈을 묻는다. 땅이 채 녹지 않아 처음에는 삽이 잘 박히지 않지만, 장정 여럿이 돌아가면 파니 여윈 소년 하나 묻기에 충분한 구덩이가 삽시간에 생겨난다. 주룡도 소매를 걷고 몇 삽 거든다.
입관도 못 하고 그저 급하게 꿔온 삼베 한 필로 온몸을 동인 남편이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주룡은 눈 한 번 함부로 깜빡이지 못하고 지켜본다. 생각 같아서는 구덩이에 들어가 같이 누워 이제 흙 뿌리라 악을 쓰고 싶다. 그조차도 마음뿐, 사지에 손아귀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이미 실신한 것 같은 기분이다. - p.93
단상) 독립투쟁으로 이루어져 내용의 소설이지 알았지만, 아니다.
통화현(간도)에서 강주룡과 최전빈의 첫날 밤 치루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신혼 생활을 하다가 전빈과 주룡은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소규모의 독립군에 가담하여 총기류를 탈취하고, 대금업하는 곳을 털기도 한다. 그리고 주룡과 전빈이 다툼으로 인해 잠시 헤어지지만, 전빈이 죽음을 맞이한다.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 궁금하다. 오늘 쉬는 날이라서 조금 무리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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