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소 설 발 췌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 3

물빛향기 2020. 3. 18. 22:50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읽기 (p.123~163)

  

   

구경거리가 많아 마음이 들뜨기도 하는 한편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젠장, 아직 젊어 내 돈 내가 벌어 쓸 수 있는데 뭐가 걱정이람. 남이 보다 버린 신문을 주워 묵을 곳과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셋방에 먼저 가서 이미 취직했다 거짓말을 해서 주소를 받고, 공장 면접을 가서는 그 집 주소를 써냈다. 제가 한 일이지만 머리가 꽤 잘 돌아갔다 싶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p.130

 

다시 시집갈 마음도 없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집이니 땅이니 하는 것도 관심 없다. 그저 제 한 몸 재미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극장 구경도 하고. 저 커피에도 맛을 들이고. 고무 냄새 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쓰담. - p.132

 

홍삼이가 내민 것은 모단 껄 그림들이다. 잡지에서 찢어낸 것 세 장에 철필로 막종이에 그린 것 한 장. 철필 그림의 여자는 길쭉하고 늘씬한 몸에 트위드 양장 치마저고리를 걸친 미인이다. 물론 머리는 단발에 좁은 챙이 달린 해트를 쓰고 있다. 주룡을 기어이 웃게 만든 것은 왼편으로 늘어진 화살표 꼬리에 역시 철필 글씨로 룡이라고 적혀 있는 점이다. 주룡은 작업반장 눈에 띄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낮추어 삼녀에게 말을 건다. - p.134

 

주룡 또한 그를 동지라고 불렀다. 마음 둘 구석 없던 시절 오라비처럼 의지한 바도 있었다. 뜻이 같아서 동지라는 말을 쓴다지만, 뜻이 같다고 뜻의 그릇까지 같으랴. 그의 뜻은 숟가락만도 못하다고 주룡은 여겼다.

그런 그이가 죽고 저는 살아 멀리멀리 도망을 온 것이 영 이상하게만 느껴진다. 이제 간도에 자기를 기억해줄 이가 몇이나 살아남아 있을까, 하는 쓸쓸함 또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 p.144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

 

옥이는 고 창곡 노랫말이 머인 뜻인지 다 알갔니?

말 그대루지 머이가 더 있간?

옥이는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한 새된 소리로 노래를 끝까지 부른다. 평소처럼 우리 옥이 재주 났다. 옥이 노래 가락 좋다 추어줄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지만 주룡은 가사를 곱씹느라 사뭇 어두운 표정이다.

창곡 이름이 머이니?

윤심덕이가 부른 <사의 찬미>. 아조 슬픈 노래로고나. - p.147

 

잠결에 끙끙 보채는 옥이 때문에 깬다. 옥이 이마 언저리에 식은땀에 전 잔머리들이 엉겨 있다. 주룡은 주전자에 든 자리끼를 헝겊에 적셔 이마 선을 닦아주고 자리에 눕는다. 그만 꾸고 싶은 꿈을 꾸던 참이다.

요사이 주룡은 간도 시절 꿈을 자주 꾼다. 주룡 자신이 주인공인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다.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의 자신이 관객이 되어 어린 자기가 자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똑똑히 아는 채로. - p.152

 

간도에 갈 여비만 모으면 그만두려던 공장 일을 여태 하고 있는 것도, 평양에 계속 머무르게 된 것도 이런 생각과 멀지 않으리라. 비록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주룡은 평생 처음으로 제가 고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풀고 옷을 벗을지 옷을 벗고 머리를 풀지를 선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부모를 따라서 이주하고, 시집을 가래서 가고, 서방이 독립군을 한대서 따라가고, 그런 식을 살아온 주룡에게는 자기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저 자신이 정하는 경험이 그토록 귀중한 것이다. 고무 공장 직공이 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은 일말 서러운 일일지언정. - p.153

 

사립에 들어서는데 어딘지 이상하다. 개가 안 짖는 거야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방이 어두운 건 별일이다. 남폿불을 켜두지 않은 것이다. 설마 하고 문을 열어보았는데 방이 비어 있다. 안방으로부터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옥이의 부친이 옥이에게 뭐라 훈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에 맥이 탁 풀리고 마는 주룡이다. 주룡이 화낼 것을 겁내 이쪽 방으로 오지 않는 어린애를 주룡이 어쩔 것인가. - p.157

 

명절에는 옛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간도에서 차리던 조촐한 차례상. 동리 사람들끼리 없는 살림에 모아 모아 진 떡. 아껴 먹으려고 감춰뒀던 생률이 나중에야 생각나서 한참 만에 한입 깨물어보니 먼지 맛이 났던 것, 귀밝이술 한 잔을 얻어먹고 기운이 뻗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종일 집 주위를 빙빙 돌던 것, 꿩도 닭도 아닌 토끼 고기를 가지고 국을 끓여 먹은 것. 그런 일들에 알신알신 끼어 있는 얼굴들. 식구들. - p.158

 

금수산 을밀봉, 못해도 10미터는 될 높은 축대 위에 멋들어진 누대를 한 채 세워둔 것이 을밀대다. 축대 위에 올라가 대동강을 굽어보아야 제대로 구경했다 할 수 있을 것인데 축대 위에 이미 구경꾼이 빽빽하다. 옥이는 주룡의 물음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 p.160

 

또 동무를 하나 잃었네. 이상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가슴을 주룡은 어루만진다. 윗 가슴에서 돋아난 뼈들이 선명하게 손에 잡힌다. 우리처럼 생긴 뼈 안에 뭔가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 p.163

 

 

단상) 주룡이 모단 걸 그림을 모으면서 꿈을 키워하고 있다.

평양에서 고무 공장에 취직한 주룡이 여러 사람을 만나며, 생활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