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소 설 발 췌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1

물빛향기 2020. 3. 25. 22:33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1


 

대니 (p.9 ~ 47)

 

    기름기가 동동 뜬 뜨거운 믹스커피 속에 얼음덩어리 몇 개가 녹으며 돌고 있었다. 달고 뜨겁고 찬 커피를 들이켜자 관자놀이께가 얼얼했다. 한 모금 겨우 마시고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 p.9

 

    남자의 피부는 지나치게 희었고 눈과 입은 좀 어색하다 싶을 만큼 켰다. 특히 까만 눈은 내가 본 적 없는 거대한 열대과일에서 떨어져 나온 씨앗 같았고, 구불부불한 머리카락은 커다란 검은 물고기의 몸에서 뜯어낸 비늘처럼 보였다. - p.14

 

    땀이 스며나온 얼굴이 따가웠다. 간장처럼 짠 햇빛이 쏟아졌다. 항의나 추궁, 변명이 아닌 내용으로 낯선 사람과 그만큼 오래 대화한 건 몇 년 만의 일이었는데 나는 자꾸만 졸아붙는 느낌이었다. - p.16

 

    아이는 아름다웠다. 곱고 사랑스럽고 반짝반짝 빛났다. 내 핏줄이 뻗어간 가지 끝에 이런 것이 맺혀 있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고 뭉클한 존재였다. 흩날리는 벚꽃 잎 같고, 밤새 쌓인 첫눈 같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보석들만 모아 정성껏 세공해서 만든 귀한 그릇 같기도 했다그 빛나는 그릇에 매일같이 담기는 타는 듯이 뜨겁고 검은 약을 남기지 않고 받아 마시는 것이 내 일이었다. - p.20

 

    몸이란 건 웃기고 요망한 덩어리라 음식물처럼 혼자만의 시간도 주기적으로 넣어줘야 제대로 일을 하겠다고 우아를 떨어댔다. 평소에는 내가 그저 기름 약간 거죽 약간을 발라놓은 뼈 무더기 같다가도, 조용한 방에 앉아 컵에 따른 소주를 천천히 목으로 넘기고 있으면 그나마 사람이라는 더 높은 존재로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가끔 검푸른 한강 물 생각이 났다. 천사 같은 손주 키우기가 유일한 소일거리이자 낙인 늙은이, 그게 내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아무도 내가 물 만큼 힘들 수도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 p.21

 

    마흔 이후로는 거울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어느 날 마주본 거울이 텅 비어 있었다 한들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노화해가는 육체를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라는 사실이 내 추레함에 당위를 부여해주었다. 나는 아무거나 집어먹고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입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와 나를 함께 비추던 그 거울이 나를 놀라게 했다. 거울은 그런 몰골을 한 내가 허깨비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의 눈에도 비치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신의 모습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 p.22

 

    할머니의 어떤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견디는 거죠, 그런 건?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알게 된 거예요. 다른 게 또 있어요. 할머니는 행복한 순간에도 견딜 때가 있었고, 견디는 순간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같은 표정일 때가 있었어요. 저에게는 그게 의미가 있었어요. - p.42-43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대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끝을 받아들였다. 나는 일흔두 살이고,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그것을 견딘다. - p.47

 

    단상) 더운 날 할머니는 손주 민우와 놀이터에 앉아 있는데, 낮선 한 사람이 말한다. 아름다워. 대니는 보모 로봇을 만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