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2
굿바이 (p.51 ~ 82)
오늘이 그날이 될 수도 있다. 천사가 내려와 나를 침묵하게 하는 날. 내 모든 지혜가 끝나버리고, 모든 걸 잊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고 마는 날. 눈을 뜰 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눈을 도로 감는다. 요즘 들어 차갑고 딱딱한 예감에 잠을 깨는 날이 부쩍 늘었다. - p.51
나는 당신을 꿀처럼 혓바닥으로 희롱하다 삼키는 나를 본다. 팔과 다리 관절이 망가진 채 텅 빈 방안에 주저앉은 당신이 보인다.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된 당신의 육체를 차례대로 맛보고 먹어치우는 내가 거기 있다. 당신의 손끝에서 나는 향기. 보드라운 젖가슴의 감촉. 제법 많은 것을 담던 눈. 움직임이 멎은 지 오래인 발과 한때는 멀리까지 듣던 귀. 나는 느낀다. 기쁨으로 양끝이 당겨진 당신의 창백한 입술의 맛을. 당신이 잃어버릴 모든 것들의 달콤함과 안타까움을. - p.54
‘새로운 세계’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동화에 나오는 호박마차가 떠오른다. 두꺼운 얼음 밑 물속에 가라앉은 당신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달콤한 향기와 은은한 종소리를 사방에 흩뿌리는 호박마차가 얼음 위를 지나가며 희미하게 발굽 자국을 남기는 것만 같다. - p.55
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이 전혀 아니다. 내 몸을 채운 이 모든 지혜가 당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당신은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투명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고, 비슷한 빛깔들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당신은 그랬다. - p.58
피부로 태양광선을 받아들이고, 육체노동을 통해 그것을 소화시키는 생활에 우리는 조금씩 익숙해져갔습니다. 태양은 무한히 공짜였고 해야 할 작업은 많았습니다. 이해가 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상당히 단순하고 명쾌한 데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 p.66
사랑하는 당신. 당신은 나를 사랑함으로써 어떤 장소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장소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그건 당신이 흐르는 피인데 어느 날 갑자기 혈관이 사라진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당신이 좋아하던 소박한 가게가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버렸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붉은 페인트로 벽에 칠해진 커다란 엑스 표시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거울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에게 기쁨을 주고자 노력할 것이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줄 수 있는 종류의 찬란하고 명징한 기쁨을. 당신은 아마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진심으로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이 잘 되어간다면. 겨울이 너무 가혹하지 않다면. 그러나 그 기쁨을 느낄 때,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장소에, 당신이 모르는 사람이 되어 서 있을 것이다. 누구도 당신이 예전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p.68
국가가, 그리고 세계 공동체가 우리를 지원해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인간 몸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비용을 부담하게 해서 그들의 남은 평생을 빚에 가둬놓다니요? 제가 알기로, 사람들이 육체를 포기하면서까지 낯선 행성으로 떠난 건 그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지 그런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 p.73
화성은 오래전부터 지구인들이 살 곳으로 예정돼 있었다. 당신은 오랫동안 이 세계가 아닌 어딘가를, 인간을 넘어선 존재를, 다른 형태의 사회를 상상해온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물리도록 들으며 잠들고, 우유처럼 마시며 성장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충격을 받는다. - p.74
당신은 김밥 하나를 입에 넣는다. 달다. 하나씩 하나씩, 시간을 들여 김밥 한 줄을 다 먹는다. 스파이디가 돌아간 뒤 당신은 회색으로 얼어붙은 그녀의 본래 몸을 임시 냉동고에 밀어넣기 전에 삼십 분쯤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솟아난 것은 식욕이었다.
당신은 한 줄을 끝내고 한 줄을 더 먹는다. 입술에 묻은 참기름을 혀로 핥는다. 참깨 한 알이 책상 위로 굴러 떨어진다. 당신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입에 넣는다. 아름답게 죽고 싶어하는 그녀에 대해 당신은 생각한다. - p.75
그녀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양수 속을 휘젓는 작은 팔다리 사진 때문에 끝내야 마땅한 관계를 끝내지 못하고 계속해온 당신을. 한번도 자신만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삶, 그 나머지마저 기꺼이 다른 몸을 지키는 데 바칠 준비를 하며 입술을 앙다무는 당신을. - p.76
작고 낡은 병원의 분만 대기실. 당신은 어지러운 꽃무늬 벽지를 말없이 들여다본다. 노란 형광등 불빛이 눈을 자극한다. 차갑고 축축한 검사대의 감각이 허벅지를 감싼다. 당신은 눈을 감는다. 숨을 크게 쉰다. 아무렇지 않다.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어떻게든 되어갈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 p,77
단상) 천사가 내려와 나를 침묵하게 하는 날, 꿀처럼 혓바닥으로 희롱하며 나를 본다. 육체노동을 하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쁨을 주고자하며, 김밥을 먹기도 하고 분만대기실에서 말없이 눈을 감고,,,
발췌는 좀 하는데 서평이나 단상 쓰기가 잘 안됩니다. 무엇을 굿바이 하는지 답답하다.
나의 자녀들을 만날 때가 생각이 난다. 분만실에서 대기하던 아내를 밖에서 지켜보면서 한없이 안쓰럽고 행복했던 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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