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소 설 발 췌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3

물빛향기 2020. 3. 27. 21:56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3

 

쿤의 여행 (p.85~114)

 

   쿤을 뜯어냈다. 말 그대로, 뜯어냈다. 길고 힘든 수술이었다고 의사는 말했다.

   내게 붙은 쿤은 내가 자랄 모습으로 자라났다. 처음에는 우무나 곤약과 비슷하게 물컹거리는 회백색 덩어리였던 그것은 다 자라자 무표정한 마흔 살 여자의 모습으로 굳었다. 윤기 없는 머리카락에 작은 눈, 넓은 어깨와 전체적으로 약간 살집이 붙은 몸을 지닌 여자였다. 예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이 없어선지 다소 답답해 보였다. - p.85

 

   굴비를 굽고 소시지와 달걀을 부쳐 아이에게 밥을 먹였다. 쿤의 손으로는 쉬웠던 부엌일이 내 손에는 아무래도 붙지 않아 몇 번이나 뒤집개를 떨어뜨리고 식칼을 놓쳤다. 주방기구들이 온몸으로 나를 거부하는 듯했다. 회복이 덜 되기도 했지만 중학생 정도의 몸으로 집안일을 예전만큼 하긴 무리였다. 보이는 곳만 깨끗하게 닦고 빨래는 하루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였다. - p.88

 

   떡볶이와 만두를 시켜놓고 분식집에 오래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와 라면을 시켜 먹고 나갔다.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언덕을 올라 학교로 도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중학생이 야간 자율학습이라니. 나는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교실로 돌아가는 아이들 사이에 섞여 유령처럼 걷다가, 교문 앞에서 멈췄다. 바쁘게 뛰어가던 아이들이 교복을 입지 않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검푸른 밤 한가운데 희끄무레하게 떠 있는 운동장은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처럼 괴괴했다. 저만치 불 켜진 학교 건물을 보고 있으려니 식은땀이 났다. 저기 들어가 볼 마음을 먹고 왔다. 저 복도를 다시 걸으면, 저 교실에 들어가 앉으면, 저 건물에서의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 p.94

 

   나는 쿤을 업은 채 신음을 흘리며 열람실로 갔다. 검색용 컴퓨터에 을 입력했다. 수없이 많은 밀란 쿤데라 연구서들 사이에서 제목을 찾아냈다. ‘쿤을 없애는 법’. 나는 자연과학 서고로 가서 책을 찾아 빼냈다. 쿤이 두 팔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쿤의 팔을 잡아뜯으며 간신히 책을 펼쳤다. 쿤을 영원히 없애는 법 : 거울을 볼 것. 책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 p.104

 

   숨을 깊이 들이쉰다. 가슴을 지나 배까지 공기가 가득찬다. 내쉰다. 입과 코를 지나 머리 위로 파란 숨이 빠져나간다. 소리를 질렀다. 목이 아프도록 소리쳐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나를 텅 빈 강당에 세우고 그녀가 맨 먼저 시킨 건 우는 연기였다. 시늉은 했으나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웃다가 죽을 것처럼 웃어보라는 게 그다음 명령이었다. 웃음은 울음보다는 쉬웠지만 도중에 사례가 들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 p109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있고 싶지 않은 장소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그런 곳을 상상해. 가장 어둡고 무겁고 슬픈 곳을. 그리고 거기서 뛰어나와 달리기 시작해 나 자신이 죽도록 싫어지면 난 그렇게 해. 달리다보면 반대편의 장소가 떠올라. 내가 되고 싶었던 내가,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져.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한지 - p.110

 

   우연히 그날 그곳을 굴러가고 있던 쿤은, 그러니까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우무처럼 물컹리고, 곤약처럼 미끄러운 작은 회백색 덩어리일 뿐이었다. 나는 내 앞을 지나가던 쿤을 붙잡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순간, 쿤 표면에 주르르 흐를 만큼의 물기가 배어나왔다. 당황하는 듯한 느낌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져왔다. 잡히지 않은 부분이 아래위로 좍, 늘어났다. 그러더니 도망치려고 있는 힘을 다해 울컥거리기 시작했다. - p.111

 

   몸부림치던 쿤의 윗부분이 납작한 원반 모양으로 점점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더니 내 상반신을 담요처럼 폭 덮었다. 도망칠 길이 없었으니 제 딴에는 자기 몸을 방어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한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이대로 죽는 건가,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잠깐이었다. 쿤으로 덮인 몸이 천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휘젓던 두 팔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며 몇 십 초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고는 그 축축한 덩어리 속으로 손을 넣어 내가 안을 수 있는 만큼 그것을 감싸안았다. 그날 나와 닿은 그 순간부터 쿤은 내 몸에 붙어살게 되었다. 내 겉모습을 취하고, 내 명령에 복종하며, 내 역사를 공유하고, 나 대신 추해지면서. 그러니 실은 쿤이 나를 빨아먹은 게 아니라, 내가 쿤을 취하고 사용하고 버린 것이었다. - p.112

 

단상) 쿤의 여행 - ‘이 무얼 뜻할까? 읽으면서 고민했다. (지방), 또 다른 나, 내면의 아이, 등등 어느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앞에서도 몇 분들의 단상을 보면서 조금 쉽게 읽기는 했는데, 그래도 조금 어려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