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소 설 발 췌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4

물빛향기 2020. 3. 28. 22:29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4

 

루카 (p.117~150)

 

    생존해야 한다는 본능으로 팔다리를 분주히 허우적거렸으나 불에 태우고 싶은 기억들이 트럭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많았고, 싫은 것을 좋다고 하기는 절대로 싫다는 성난 마음 때문에 눈매가 사나웠으나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그만큼 강해서 전체적으로 눌리고 주눅든 표정의 덩어리가 되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 p.119

 

    올 수리가 되어 있긴 했으나 지은 지 이십 년도 넘은 오래된 빌라였고 여름에는 곰팡이가, 겨울에는 결로가 다정한 병()처럼 찾아왔다. 먼저 살고 있던 할아버지가 자식들이 새로 사놓아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며 넘겨주고 간 낡고 작은 냉장고에 요리책을 보고 만든 형편없는 반찬들을 빼곡히 채워 넣고 집 앞에 버려진 앉은뱅이책상 하나를 주워다 깨끗이 닦아 식탁으로 썼다. 닦고 고치고 손질하고 광을 내는 그 모든 번거로운 노동 하나하나가 우리에겐 은밀한 과시와도 같았고 가난과 아기자기한 비밀로 둘러싸인 생활의 사치가 최초의 빛을 잃을 때쯤 우리는 또다른 빛 하나를 집에 들였다. 모임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계를 밝히고 모두를 초대한 것이다. - p.124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를 걸으며 그래서 너는 변하지 않는 거니? 언제 변할 건데? 하고 한 점도 변함없이 기다리는 어조로 묻는 아버지의 지친 목소리를 들으면 당장 늑대로 변해 아버지 앞에서 닭의 목을 물어뜯으며 피를 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시간들을 종합해보면 내게는 모두의 앞에서 나를 분명히 밝힌 경험이 영원한 회한으로 남지는 않았다. 문이 열린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용기보다는 침묵이, 대담함보다는 소심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 나였으므로 더욱 그랬다. - p.126

 

    덩그러니 버스정류장 하나가 있을 뿐 그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동물원으로 보이는 공간은 없었고 건물이나 힌트가 될만한 어떤 표지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나가는 사람 또한 없었다. 팔차선 고속도로 양옆으로 거대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고 제법 알갱이가 굵은 모래가 바람에 섞여 날아와 얼굴을 때렸다. 멀리. 까마득히 먼 거리에 거인의 곱슬머리 같은 검은 숲이 늘어서 있었다. 그뿐이었다. 그 풍경은 그의 앞뒤로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이어져 있었다. - p.136

 

    언제부턴가 우리의 대화는 잘못 깎은 연필심처럼 끊겨나갔다. 그러지 않았던 날들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따위의 말이 나오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 말이 나온다 한들 거기서 허망하게 대화가 끝나버리는 일도 없었으며 방에서 음악을 들을 대 서로에게 방해가 될까봐 이어폰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같이 듣고 같이 느꼈다. 너는 둥근 주걱 모양으로 길어질 때까지 발톱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고 나는 식탁에 함부로 그릇들을 탁, 탁 내려놓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너에게서 그렇게 빨리 등을 돌려 돌아앉지 않았다.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 나는 거실로 나갔다.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델 것처럼 뜨거운 물 아래 오래 서 있었다. - p.138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그렇게 몇 시간쯤 걸었을까. 그는 갑자기 오래전에 죽은 자신의 아들, 너를 떠올렸다. 아무도 없는 길을 예성이가 이렇게 걷고 있었겠구나. 그는 생각했다. 아는 사람들을 지구 반대편처럼 아득한 곳에 두고,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상태로 말이다. 그러자 너에게 소리친 기억이 떠올랐다. 계속 소리를 쳤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입이 없어지고 목소리가 없어지고 몸 전체가 녹아 없어질 것 같았으니까요. 아마도 어떻게 그렇게 모두를 속일 수 있느냐는 말을 했을 겁니다. 가족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너 자신을 속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요. - p.140

 

    우리 안에 들어가 살아 있는 사자와 호랑이를 손으로 만지면, 그 정도로 무서운 경험을 하면 다른 무서움이 사라질 거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었다. 그 다른 무서움은 그때까지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잡을 수 없던 그의 어떤 기억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한평생 속해 살아온 교회라는 두 세계를 그는 동시에 감당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느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믿는 것으로 그의 혼란은 수습되었고 그의 건강을 염려한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애도했고 신을부터 용서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갑자기 알게 된 것이었다. 살아 있는 아들을 죽은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자신의 이성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기 더 쉬운 그 선택을 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고, 한평생 그토록 소중하게 지켜온 자신의 믿음이었다. - p.147

 

    리필한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의 얼굴은 천천히 내 앞에서 억압하는 자, 편협한 자, 닫혀 있는 저의 그것으로 변해갔고 그는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 다. 그가 그토록 먼길을 걷고 오랜 시간을 헤매고 가슴을 치며 괴로워했다는 사실은 내게 사실은 내게 어떤 연민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 p.149

 

단상)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