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6
핍 (p.191~234)
그가 입은 셔츠는 얼룩 없이 깨끗했고 잘 다림질되어 있었으며 소매에는 한 쌍의 커프스, 목에는 보타이가 소박하지만 기품 있게 장식되어 있었다. 음악은 없었고, 쟁반은 종이로 만든 것처럼 가벼웠다. 윤기 나는 검은 구두를 신고 손님들을 향해 걷는 동안 핍은 자신이, 실은 그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가 접시를 내려놓을 때면 그들은 희미하게 웃으며, 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 p.191
머리가 길고 슬립 밖으로 나온 양팔과 다리가 온통 얼룩덜룩한 소녀가 핍을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소녀의 온몸에 난 줄무늬는 립스틱이었다. 눈 주위에는 검은 마스카라가, 입가에는 붉은 립스틱이 함부로 뭉개져 있었다. 소녀는 붉은 줄무늬가 손자국처럼 어지럽게 난 목덜미를 손톱으로 긁더니. 아이를 끌어당겨 안고 한 손에 든 책을 읽기 시작했다. - p.197
공기에 깨처럼 까만 재가 섞여 날아다녔다. 이마에서 배어나는 땀을 느끼며 사십 분쯤 걷다보면 일터였다. 핍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을 헤치고 맨 앞으로 가서 열쇠로 유리문을 열었다. 아이들의 주문을 차례로 받고, 피자가 나오는 데 걸릴 대략적인 시간을 알려주었다. (중략) 그는 꼼꼼히 따져보고 수지가 맞을 것 같을 때만 현물거래를 했다. 그래서 그날 모자를 쓴 아이가 콘돔한 팩을 내밀며 피자 두 판을 요구했을 때, 그는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p.202~203
밤이었고, 핍은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아기는 핍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세차게 울러댔다. 얀은 두 팔로 아기를 받쳐 안고 거실의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얀이 눈을 감고 있을 거라고 핍은 생각했다. 얀은 이제 눈을 감고도 비틀거리지 않고 안전한 동선을 발로 외워 아기를 운반했다. 베란다 문 앞에서 부엌 싱크대까지, 그 짧은 거리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얀은 걷고 또 걸었다. - p.213~214
아직은 괜찮은 걸까? 언제까지 괜찮은 걸까? 냉동실의 얼음이 녹고, 창고의 식료품이 모두 떨어지고, 공장들이 멈추고, 우리의 어설픈 손과 마음만으로 때우고 땜질해놓은 것들이 점점 마모되어 부서져 버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 p.227
거실로 나가 가스렌인지 위에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보았다. 고소한 된장국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핍은 밥통을 열어 김이 오르는 밥을 퍼서, 식탁 앞에 앉아 김치와 국과 함께 천천히 먹었다. 혼자서 밥을 먹어보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고, 그래선지 공기에는 묘한 그리움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한 그릇을 다 비운 뒤에, 핍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앉은 채 주위를 돌아보았고, 식탁 위 빈 곳을 보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 p.234
단상)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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