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소 설 발 췌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7

물빛향기 2020. 3. 30. 16:04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7

 

캠프 루비에 있었다. (p.237~286)

 

    술에서는 평생 위스키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한 방향제 같은 맛이 났고 돼지고기 안심 맛이 나게 할 목적으로 소스를 과도하게 쏟아부은 합성육 스테이크는 너무 질겼다. 모두가 억지스럽게 옛날을 상기시키는 조잡하고 얕은 맛이었다. - p.241

 

    어떤 오후. 젖은 붓으로 칠한 것처럼 이리저리 번져 디테일이 지워진 얼굴들. 남자와 여자. 옛 동료들. 오랜만의 휴일이었다. 거실에서 졸업파티가 나오는 그 고전 청춘영화를 함께 본 후 그들은 가볍게 저녁을 먹고 차와 술을 마셨다. 많이 웃었고 많이 떠들어댔다. 영화 속 장면을 흉내내 우스꽝스러운 춤도 추었다. (중략) 대화의 끝에 누군가가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p.247

 

    린의 눈꺼풀이 꿈과 함께 흔들렸다. 그러나 깨지는 않았다. 피아노 줄을 타고 슬며시 내려와 배우들 틈에 섞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꿈속의 역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며 관찰하는 린 자신의 인격이 꿈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중략)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누군가가 되는 꿈, 하지만 섬바디가 린을 데려가는 곳은 언제나 같았고, 언제나 린의 기대와는 달랐다. - p.251

 

    꿈은 그 시점부터 거추장스러운 추진체를 떼어버린 것처럼 어지러운 속도로 날아갔다. 린은 어느 순간 아기가 아니라 소년이었고, 복도마다 과일과 꽃 그림이 그려진 낡은 건물의 작은 방에 앉아 지루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 앞에 차례로 와 앉는 사람들의 마음을 린은 책처럼 꼼꼼히 읽었다. - p.252

 

    빛의 속도라는, 옛 인류가 절대적이라 여기던 한계치가 무너지자 태양계는 순식간에 좁은 손바닥이 되어버렸다. 인간이 새롭게 손에 넣은 속도로는 명왕성도 너무 가까웠다. 몇 번의 실험 후 뉴스를 통해 복잡한 문제가 제기되고 토론이 이어졌다. 지구에서 목표 행성까지의 거리에 비해 추진기가 낼 수 있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이 줄발점과 도착점. - p.254

 

    문제의 성장기(成長器)라는 기계는 세대 우주선에 장착될 계획으로 개발된 후 시험가동을 기다리며 다른 부속장치와 함께 엘레스의 기지에 보관중이었다. 그것은 수정란에 영양을 공급해 태아로 키워낸 후 인공분만까지를 맡는 기존의 인공자궁 기능에 더해 인간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뇌에 직접 공급하는 방식으로 일정한 나이까지 아이를 성장시키는 기능까지 갖춘 형태였고 린은 그 두 번째 기술의 공식적인, 그러나 비밀에 부쳐진 첫 수혜자가 되었다. - p.257

 

    시간을 되감는 일은 어둠이 선사하는 환상 속에서나 가능하며 우리는 어떤 곳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 - p.263

 

    온화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붉은 포자 하나가 아쉽다는 듯 그가 닫아버린 창문 유리를 타고 미끄러져내렸다. - p.267

 

    여왕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다른 개체들도 한 방향으로 뭉치며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간다, 달린다! 그들은 사람들과 버섯들 사이를 헤치고 습지의 끝 쪽으로 가고 있었다. 반대 방향이었다. - p.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