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8 끝
엘로 (p.289~337)
울어도 소용없었고, 실은 울 만큼 억울함이나 부당함을 느낄 처지도 못 됐다. 마음의 껍질은 바스락거리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지만 더 안쪽은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파랗게 내려앉는 아침을 보며 마르한은 박히기 시작한 못처럼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 p.289
그는 다시 흡음초 뿌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멀리 서쪽에는 뿌리를 뽑을 때 소리를 질러 사람을 죽이는 풀이 있다는데, 마을 뒷산에 무서히 자라나는 흡음초는 그 반대라 땅에서 뽑아내면 주위의 소리를 빨아들이는 식물이었다. 갈아서 즙을 내 마시거나 달여 먹으면 반나절 동안 사람의 청각이 둔해져 시끄러운 소음을 견디기가 쉬워졌고, 채반에 받쳐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주위의 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 - p.291
불거져 나온 알갱이는 건드려 없애기 쉬운 편이었고, 사람은 아무리 슬프고 불행해도 사소한 행운 하나로 며칠을 웃으며 보내기도 하니까. 너에게 행운을, 당신에게 새 신 한 켤레가 생기기를, 여자들 앞에서 말으 더듬지 않게 되기를, 머리카락이 무러무럭 자라나기를, 몸에 살집이 도독하게 붙기를. - p.295
수레를 끌고 보따리를 이고 지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기에 마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들을 역병을 피해, 그리고 세금을 낼 수 없어서 보금자리를 옮기는 사람들이었다. 한데 모이고 뒤섞여 살던 사람들이 방울방울 흩어지기 시작했다. 귀족과 평민의 경계가 무너진 것도 잠깐, 이제는 신분이 아니라 가진 것에 따라, 가진 사람들은 가진 사람들끼리, 못 가진 사람들은 못 가진 사람들끼리 다시 모여 살게 되었고, 왕은 못 가진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다. 역병은 마르한의 마을까지는 오지 않았지만, 다른 역병이 왔다. 엘로였다. - p. 301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마법사는
다음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첫째, 행복한 사람 한 명의 피를 유리병에 가득 담아
충분한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릴 것
둘째, 나무를 베는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할 것
셋째, 내리지 못하는 빗방울 언덕으로 가서
거기서 얻은 것으로 4천 함펜을 만들 것
되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 p.308
여자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열여섯, 열일곱쯤 돼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서 있었다. 치마처럼 통일 넓은 바지를 입고, 짧게 자른 머리칼은 삐죽삐죽 여러 방향으로 뻗쳐 있었다. 어는 나라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방인이었다. 피부색이 짙었고, 억양도 미세하게 달랐다. - p.309
마르한이 고개를 저었지만, 소녀는 가짜 새똥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 계속 누군가에게 저주를 걸어달라고 했다. 모든 마법사는 저주 거는 법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저주에 걸린 게 아니면 먹고살기가 이렇게 힘들 수가 있겠느냐고 소녀는 투덜댔다. - p.313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빗방울 하나를 건드려보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두 개로 붙잡고 당겼다. 마주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밀었더니, 아주 강하게 마주 미는 힘이 느껴졌다. 빗방울을 뚫지 않으면 언덕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더 세게 당겼다. 톡, 소리가 나며 허공에서 빗방울이 뜯겨 나왔다.
마르한은 손바닥에 놓인 차갑고 동그란 빗방울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흐트러지지 않고 굴렀다. 둥글게 깎아낸 얼음처럼 보였으나, 가만히 눌러보니 의외로 말랑말랑했다. - p.327
힘을 되찾게 되면, 다시 누군가의 행운을 빌어줄 수 있게 되면, 그는 엘로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가 열심히 일할 것이다. 먼지를 닦고, 희망차를 끓이고. 정말, 열심히 살고 싶었다. - p.329
마르한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먼지가 쌓인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희망차를 끓여 좋은 향기가 맴돌게 했다. 2천 함펜을 들여 집을 공방으로 개조하고, 돌을 다듬는 도구와 장식에 들어갈 재료들을 산 다음, 그는 조약돌 공예를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망토 대신 작업복을 입고 돌을 주우러 다니는 마르한을 처음에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가 만들어낸 목걸이와 반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다시 들여다보더니, 마침내 감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종 물건을 사러 왔고, 장사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 p.333
희망과 두려움을 반반씩 품고 자신을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끝없이 의심하던 마음이, 하루하루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그 괴로움이 사라지자 몸은 한결 편해졌다. 다만 ……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그의 몸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몸속에 깊이 박혀 있던 핵심이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p.334
단상) 러브레플리카의 ‘엘로’
앞에 단편보다는 읽기 수월하게 읽어 나가고, 줄거리도 조금씩 머릿속에 남아 있다.
마르한은 지역 사회에서 선한 마법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으면서 길을 떠난다. 본인이 만나고 싶었던 마법사는 세상을 떠나고 없었고, 그는 위대한 마법사가 남긴 글을 보고 다시 떠나지만, 양심에 걸려 어떤 수행도 성공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마르한은 고향에서 평화롭게 평범하게 소중한 사람들과 작은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고, 그것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것 같다.
러브레플리카을 마치며)
소설책을 이렇게 어렵게 읽기는 러브레플리카와 밀크맨, 오만과편견, 또 몇 권이 있다. 왜 이렇게 이해하게 힘들게 쓸까?
'독 서 하 기 > 소 설 발 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동 피아노 (천희란) - 1 (0) | 2020.04.07 |
---|---|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9 : 해설 - 가망 없는 세계의 사랑 (0) | 2020.03.30 |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7 (0) | 2020.03.30 |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6 (0) | 2020.03.30 |
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5 (0) | 2020.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