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천희란) - 1
“나는 지금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 장 아메리『자유죽음』
1. 네 개의 발라드 Op.10 (p.9~19)
4Ballades, Op.10
- 요하네스 브람스 Johannes Brah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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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에 혼자 있다. 이곳은 완전히 눈이 멀만큼 밝고 먼눈으로 보는 것처럼 어둡다. 이곳은 내 몸을 경우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좁고 영영 끝에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넓다. 닿을 수 없을 만큼 높고 절대로 추락할 수 없을 만큼 낮다. 나는 눕거나 서거나 앉을 수 없고 혹은 그 모든 자세로 있다. - p.9
의식은 깨어 있는 동안에 꾸는 꿈. 여기는 어디일까. 내가 기억을 더듬을 때 나는 이미 기억 속에 있다. 나는 기억 하는가. 기억되는가. 내가 기억되고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어쩌면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은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나는 방금 도착한다. 지금. 그리고 다시 지금. 나는 내가 가진 가장 큰 것을 건다. 무엇을. 무엇에.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지만 중단할 수 없는 도박이 있다. 지금 이 순간과 교환되는 지금. 낮과 밤이 함께 있고, 사건은 시간 위에 순서대로 나열되지 않으며, 누구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누구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나는 내가 언제 여기에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러나 믿음은 추론되지 않는다.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그곳에 어떻게 도착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꿈에 관하여. 우리는 깨어나며 이해하고, 깨어나며 잊는다. - p.11~12
2. 소나타 라단조 Kk.9 “전원곡” (p.20~29)
Sonata in D Minor,Kk.9 "Pastorale"
-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Domenico Searl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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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이 누구인지 몰라서, 누가 나를 사랑하는지 몰라서, 슬프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사랑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 누가 누구에게 저질렀는지 알 수 없는 잘못도 그렇게 많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게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 p.23
내가 슬프다고 말하면 슬픈 나는 물의 건너편에 가 있다. 슬퍼지려면 슬픔을 잊어야 하고, 나에게 가만히 물을 내려다보라 한다. 슬픔이 물을 건너가지 못하게, 슬퍼지려고, 슬픔이 다 사라질 때까지, 사라졌다는 것을 기억할 수 없을 때까지. 물을 본다. 한없이 유연하고 강철보다 단단한 물. 보이지 않는 깊이에서 요동치면서도 수면 위에 잔잔하게 머무는 물. 투명으로 불투명을 완성하는 물. 나는 물을 보고 물은 나를 보지 않는다. 내게 말하지 않는다. 무관심한 물. 혼자 흔들리고 흐르고 역류하고 넘치고 빠져 나가는 물. 마음도 의미도 될 수 없어서, 어떤 마음도 의미도 보존하는 물. 진실도 거짓도 전복되지 않고 물속에서는, 그냥 있다. 죽음은 언제나 바깥에 있고, 안에 있는 물은, 아무것도 내보내지 않아서 바깥이 되고. - p.24
죽고 싶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죽고 싶다. 내 목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고 싶다. 말하지 않아도 들려서, 곧 내가 죽을 것 같다. 움켜쥐면 손에 쥔 것이 저기에 있다. 달아났어도 달아나지 못했다. 내가 죽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나를 부른다.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나와 나에게 말한다. 내가 갈 수 없어서 밖이 된 것, 내 안에 이미 있는 것이. 나를 창조한 것처럼 내게 주어진 법처럼. 죽고 싶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 나의 목소리로 들려오고, 나는 묻는다. 죽고 싶은 자 누구인가. 죽이려고 하는 자 누구인가. 죽으려고. 죽이려고.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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