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천희란) - 2
3. 피아노 소나타 제16번 가단조 D.845
Piano Sonata No.16 in A Minor, D.845
-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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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을 약속받고 태어난 듯한 존재가 있다. 그의 불행은 사건이기도 하고 성정이기도 하다. 불행이라기보다 고통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불행은 해석의 대상이지만, 불행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은 해석되지 않는다. 식지 않는 불덩이를 안은 것처럼, 그는 매 순간 고통을 느낀다. 너무 많은 고통에 길들여져왔기 때문이다. 하물며 작은 폭죽처럼 터지는 일상의 기쁨에서마저 고통을 느낀다. - p.30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고 맥박이 날뛴다. 선명하게 아프다. 그러면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고. 다른 목소리. 또다른 목소리. 끝없는 대화가 시작되어, 그의 주장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그를 두둔하기에 이르고, 이윽고 부정을 부정하며 꼬리를 문다. 도끼로 꼬리를 내리치려 하면 거기에 그가 누워 있고, 그는 도끼를 휘두르는 손의 의지가 누구의 것인지 의심하고, 누워 있는 그가 도끼를 쳐들고 있다. - p.37
4. 네 개의 만가 Op.9a.Sz.45
4Dirges,Op.9a,Sz.45
- 벨러 버르토크Bela Bar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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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갈 어둠도 도래할 빛도 없는 듯한 풍경 안에 들어가 있자면, 들짐승의 울음도 새들의 지저귐도 없고, 나와 나의 고통만이 하나의 의자에 포개어 앉아 있다. 고통이 출렁이지 않는 물 아래 가라앉으면, 나는 나로부터 슬그머니 물러나, 비로소 투명해진 나의 상념을 지켜보았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뒷모습은 언제나 갓 완성된 회화처럼 보인다. 실수로 떨어뜨린 한방울의 물감이 봄볕 쏟아지는 잔디 위에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부인을 살해하기도 하는 것처럼. 살짝 문지르면 마르지 않은 어깨의 윤곽이 창백하고 그윽한 그늘 속에 흩어져버릴까봐. 만지지도 않고, 말 걸지도 않고, 걷거나 뛰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는다. 물보라가 고통을 흔들어 일으키고, 탁한 고통의 소용돌이가 다시 나를 끌어당길까봐. 날이 밝고 밤이 깊기 전에. 그런 것을 겨우 휴식이라 불렀다. - p.39~40
고통에 아무리 익숙해져도, 고통 앞에서 아무리 무기력 해져도, 고통에 마비되지 않는다. 완전한 체념에는 이르지 않는다. 고통은 고통을 예견하는 능력을 주고, 파견한 적 없는 척후병이 불안의 휘장을 들고 돌아온다. 고통은 불안을 마주보고 앉는다. 불안을 물과 빛으로 삼아 무서해진다. 나무의 뿌리가 암반을 쪼개듯이, 고통은 아직 오지 않은 사건으로 번성하고,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휴식이란 겨우, 불안한 나의 뒷모습에 액자를 씌우고 잠시 바라보는 일. - p.41
사람들은 옷장에 무서운 것이 있는 것 같다면서 옷장 문을 연다. 거기에 무서운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옷장을 열면 옷이 걸려 있다. 옷장 안으로 손을 뻗으면 꽉 막힌 벽이 있다.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러나 옷장 문을 닫으면 무서운 것이 있는 것 같다. 쫓아내려고 문을 열어도 문을 열면 쫓아낼 수 없는 무서운 것. 왜 아무도 옷장에 빗장을 걸지 않을까. 왜 옷장을 내다버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면, 잠이 쏟아진다. 아침이 밝는 줄도 모르고.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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