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천희란) - 4
10. 피아노 소나타 2번 올림사단조 Op.19 “환상소나타”
Piano Sonata No.2 in G-Sharp Minor, Op.19 "Sonata Fantasy"
-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Aleksandr Skrya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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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빛 속에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 낮의 광영이 사라지고 찾아온 부드러운 어둠과 으스러진 달빛의 집념 아래서, 침대는 나의 등을 끌어안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뚜렷한 현실로 돌아와도 희미해지지 않는 환영. 언어로 된 시신경이 감각을 흐릿하게 만들어 다시 나를 잠으로 데려가려 한다. 거기로 돌아가라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리 잔혹해도,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나의 삶을 바꾸지 못하고, 그저 거기에 있는 동안에는 주름이 깊어질 뿐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서 죽음을 기다릴 수 있다. - p.62~63
수목이 모두 눈에 파묻힌 길고 텅 빈 길이 산의 정상으로 이어져 있는지 수도자의 염원 속에 존재하는 신성한 사원으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목적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 아니라, 존재 하지만 아직 명명되지 않은 곳. 차라리 아직 존재하지 않아서 그것이 존재하게 될 때까지 걷기를 멈출 수 없는 곳.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그녀는 걸어간다. - p.64
믿는 것을 보는 자는 보이는 것을 의심한다. 그녀는 존재하지 않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본다. 창문이 없다. 창문이 없어도 창밖의 여자는 계속 걷는다. 눈을 감아도 그녀가 보인다. 그녀를 믿고 있는가. 그녀를 의심하는가. 다시 눈뜰 때, 그녀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형식으로 존재한다. - p.65
나는 본다. 여자를. 여자는 본다. 나를. 창밖에서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그녀를 볼 때, 존재하지 않는 그녀가 존재하는 나를 본다. 그녀는 두 눈을 홉뜨고 내게 성난 얼굴로 말한다. 파리한 입술을 읽을 수 없다. -p.69
11. 싸구려 모방
Cheap Imitation
- 존 케이지 John C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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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 앞을 서성이다 한참만에야 그 그림이 걸린 전시실로 돌아갔다. 폐 속의 산소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숨을 참으며 끝내 그림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벅찬 감정을 느꼈고, 전시장 한가운데에서 다른 관람객의 시선을 완전히 잊은 채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것이 압도적인 작품 앞에서 느낀 희열 때문이라 믿었다. - p.73
12. 열두 개의 연습곡 Op.10
12Etudes, Op.10
- 프레데리크 쇼팽 Frederic Chop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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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을 말하고 나면 말해진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오직 비유로만 말했다.
비유로밖에는 말할 수 없어서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유에 불과했다. - p.75
13. 환상곡 라단조 K.397
Fantasy In D Minor, K.397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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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장력이 물 잔 가장자리의 물방울을 빨아들이듯이 어둠은 작은 어둠의 조각들을 끌어들여 점점 더 깊어진다. 그녀는 어둠으로 멀어버린 눈을 깜빡이고, 손을 뻗어 허공을 만지며 걷는다. - p.76
그녀는 재빨리 불을 밝히듯 음악을 켠다. 단번에 장막이 걷히고, 웃음이 사라진다. 아무도 웃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 p.77
거기에서는 하나의 육체 안에 찢어진 복수의 영혼이 조화롭게 살고 있고, 조화로워서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고, 그녀는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는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좋다. 끓는 물이 찻잎을 부풀린다. 그녀는 찻잔을 들고 책상 앞으로 간다. 잔 밖으로 튄 물방울이 지난밤의 페이지 위로 떨어진다. 차가 식었다. 식었을 것이다. 식어버린 잉크가 뜨거운 찻물에 번진다. - p.78
정신을 구속하는 하나뿐인 신체와 끝없이 분열하는 목소리로 쓴다. 붙일 수 있는 이름의 수를 초과해 존재하는 목소리들에 대해 쓴다. 찢는다.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견디는 일에 대해 쓴다. 찢는다. 후회하고 찢는다. 뺨을 내리치고 찢는다. 울고 쓰러지면 찢는다. 오를 곳도 내려갈 곳도 없는 계단의 한중간에서 찢는다. 뜨거운 차가 식어가는 동안에, 끓어오르는 동안에도 아무도 죽지 않으리라, 쓰고 찢는다. 찢어진다. - 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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