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소 설 발 췌

자동 피아노 (천희란) - 6

물빛향기 2020. 5. 4. 22:04

자동 피아노 (천희란) - 6

 

17. 전주곡 내림라장조

Prelude in D-Flat Major

- 릴리 불랑제 Lili Boul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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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언제 여기에 왔지. 이상한 암시가 부푼다. 찻물이 끓어 넘치고 있다. - p.100

 

 

18. 프랑스 모음곡 1번 라단조 BWV 812

French Suite No,1 in D Minor,BWV 812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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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도 끝도 없는 열차가 시작도 끝도 없는 플랫폼을 지나친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고, 이 불확실한 상태를 형언할 수 있는 적확한 단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끝이 없는 플랫폼은 텅 비어 있고, 열차는 계속해서 들어오거나 빠져나가거나 지나치고 있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밖으로 통하는 출입구도 없다. 없다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다. 나는 홀로 텅 빈 플랫폼에서 열차를 따라 다리고 있다. 텅 비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근거가 없다. - p.102

 

    산을 오르는 일을 생각하며 더 가파른 고개에 닿을 때쯤이면 산조차 사라지듯이. 멈추려고 하지만, 멈춰지지 않는다. 반복 재생되는 필름 속의 이미지처럼. - p.104

 

    내가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는 이 플랫폼이 꿈인 것만 같다. 가끔은 잠 속에서도 잠들기 전의 일들이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해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 p.105

 

    평행선을 이루며 달리는 우리의 질주는 의지를 버린 우리의 의지이다. 우리는 우리의 분열을, 우리의 불안을, 우리의 절망을 필연이라 여기고서,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예감을, 우리의 목숨을 우연에 맡기고, 우리가 버린 우리의 의지에 결박당한 채, 썼다. 거울 앞에서, 거울의 바깥에서 주먹을 휘둘러도 두 개의 주먹이 으스러지는 것을 알고서, 거울의 안쪽에서 주먹을 부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눈을 감고 돌아앉은 등을 마주보는 것은 눈을 감고 돌아앉은 등. - p.108

 

    내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내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틀렸다. 그는 그가 있는 곳에 죽음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죽음에 맞서기 위해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 p.109

 

 

19. 자유즉흥연주

Free Improvisation

- 박창수 Park Chang-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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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4회 The House Concert(2018년 3월 19일)연주.

    즉흥연주에는 악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피아니스트는 연주자인 동시에 작곡가이기도 하다. 연주는 매 순간의 감각과 지각을 음악적 언어로 전환한다.

    연주는 촬영되거나 녹음될 수 있지만, 기록과 재연은 무의미하다. 연주는 다시는 연주되지 않는 단 한번의 연주라는 사실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즉흥연주는 악보가 존재하는 모든 음악의 실재 또한 그것이 연주되는 바로 그 순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을 듣는 동안에, 우리는 그 상실을 함께 듣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실이란 기록된 음악에서 누락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생한 연주의 현장은 바로 그 상실의 과정을 목격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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