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소 설 발 췌

자동 피아노 (천희란) - 7

물빛향기 2020. 5. 16. 22:20

자동 피아노 (천희란) - 7

 

20.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아멘의 환영

Visions De L'amen(pour deux pianos)

- 올리비에 메시앙 Olivier Messia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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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은 밤색의 업라이트 피아노가 뜯기고 분해되어 실려 나간다. 상판이 뜯기고, 하판을 떼어내 드러난 현과 철골 프레임은 녹이 슬고, 나무로 된 낡은 울림판은 삭고 휘어 있다. 건반의 높이는 들쭉날쭉하고 흰 건반 곳곳이 누렇게 얼룩져 있다. 나는 조금만 움직여도 흔들리는 피아노 의자에 마지막으로 앉아 있다. 의자에서 꺼낸 악보들의 빛바랜 표지를 내려다본다. 악보를 읽는 법이 기억나지 않는다. - p.113

 

    더 많은 계절을 지날수록 알 수 없게 되는 것들이 있다. 새롭게 배운 언어가 앞서 배운 언어를 지우듯이. 뒤따라오는 파도가 해변의 파도를 지우듯이.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인파가 나를 지우듯이.

    나는 마지막까지 객석에 앉아 무대 위에서 마주보고 있는 커다란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바라본다. 객석에 불이 들어올 때, 악기는 차분해진 빛 속에서 숨죽인다. 연주가 끝나고 연주자가 무대를 떠나면 관객들도 객석을 떠난다. 아무도 무대 위에 놓인 악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 p.115

 

    어두운 객석에 앉아 단단하고 깨끗한 피아노의 음성을 들으면, 매번 그 연주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연주가 지속되는 만큼의 시간만을 살 수 있어서.

    밤이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는 도시의 소음을 가로지르면 음악의 여운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그런 여운은 다시금 찰나 속에서 무한의 시간을 살게 한다. 나는 어둠속에서 스스로를 연주하는 피아노를 상상한다. 그리고 곧, 다시 내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p.116

 

 

21. 무제

Until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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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찻잔이 있고, 창밖에는 녹음이 가득하다. 나는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떠오르는 단어들을 쓰고 지운다. 더운 바람이 시선을 끌고, 고개를 돌리면 여자가 걷고 있다. 그늘에 무리지어 앉은 사람들의 웃음소리. 연주는 끝나가고, 나는 밝은 화면 위에 적힌 문장을 읽는다. 연주가 끝나간다. 끝나기 전에,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쓰거나 말하지 못했던 것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파도를 일으키고, 눈을 감으면 나는 벌써 심해에 있다. - 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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