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천희란) - 5
14. 세 개의 피아노 소품 Op.11
Drei Klavierstucke, Op.11
- 아널드 쇤베르크 Arnold Scho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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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지평선 위로 하얗고 커다란 소용돌이가 주홍과 분홍을 일으키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저것이 여기를 향해 올 수도 있겠다.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소용돌이를 사진으로 찍어 프린트하고, 그 종이를 두 번 접어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 방을 서성였을 뿐인데, 집이 흔들리고, 천장에서는 분진이 떨어지고, 바닥이 기울었다. 크고 하얀 소용돌이가 진로를 가로막은 건물 외벽을 들이받고, 굉음이 들렸다. 내가 베란다를 향해 뛰어갔을 때, 소용돌이는 이미 경로를 틀어 석양이 지는 쪽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간헐적인 진동과 함께 바닥이 미세하게 기울고, 몸 안의 중심축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 p.84~85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붉은 빛이 들고, 커튼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다. 아직도 꿈 속일까봐. 방은 꿈속에서 본 것과는 조금 다르고, 내가 오래전에 일기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그제야 주홍과 분홍을 일으키던 소용돌이가 가로지르는 하늘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 p.87
15. 사계 Op.37a
The Seasons, Op.37a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Pyotr Il'ich Chaikovsk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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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직 살아보지도 않은 계절에 이미 다녀온 것처럼 전부 알고 있었던 거야. 정말로 기적 같았지. 한 계절이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일.
16. 다섯 개의 피아노 소품 S.192
5 Klavierstucke, S.192
-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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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홀연히 나로부터 빠져나와 허공에 떠 있는 눈으로, 나의 아픔, 외로움, 사랑, 희열, 공포, 배신과 모욕, 그리고 내 삶의 지반을 뒤흔드는 광증의 기미를 지켜봤다. 모든 장면을, 장면 속의 사건을, 사건 속의 감각을,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모조리 기억하려 했다.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해서, 더는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더는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 나의 언어로 불변하는 진실이 될 수 있다면, 사랑이라면 사랑을, 미움이라면 미움을, 수치라면 수치를, 넘어진 자리에 표지를 세우면, 그 자리에 언제 다시 불려 가더라도 넘어지지 않으리라고. - p.91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린다. 만일 끓어오르는 물이 발등위로 쏟아진다면, 비명이 터져 나오고 눈물이 흐르겠지만, 동시에 비명의 음정과 눈물의 촉감을 식어가는 물로 손바닥에 적고 말겠지. 붉게 일어나는 피부와 발등에 들이부어진 열기, 증기가 솟아오르는 형상을 기억의 한구석에 각인하려 할 것이다. 이 고통을 기억하자고 다짐하는 사이에 상처는 깊어질 테지만, 내가 아파하는 동안에, 기억하는 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어서, 아프지 않은 내가 나의 아픔을 조롱하겠지.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일이 그저 한 편의 연극 같다고 느낄 것이다. 나는 나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이고, 관객이고, 연출자라고 느낄 것이다. 나는 배우에게 요구한다. 몰입 없는 세계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자신과 하나가 되라고. - p.93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잘게 찢긴 것을 기어코 모아다 기운 누더기를 걸어두고. 아직 실재하지도 않는 당신에게 나는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기대했는가. 서로 다른 퍼즐의 조각들을 한 상자에 섞어놓은 것처럼, 맞대어놓았을 뿐 연결되지 않는 무늬들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 p.95
너무 늙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망상이다. 나는 고작 서른다섯해를 살았고, 그것은 너무 짧은 인생이다. 만일 내일의 내가 거울 속에서 오늘의 나를 본다면, 오늘의 나는 봄에 땅을 뚫고 올라온 풀포기처럼 보일 텐데. 삶이 끝나는 날까지 누구도 충분히 늙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이였을 때에도, 내가 너무 빠르게 늙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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