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천희란) - 8
【해설】 짧은 후주들 - 신예슬
찰나의 적막이 흐르고, 연주자가 피아노에서 손과 발을 거두는 순간 박수가 침묵을 뒤덮는다. 무언가를 재빨리 부수는 그 쨍한 파열음을 원망할 틈도 없이 기쁨의 탄성이 연이어 울려 퍼진다. - p.121
음악 이후
“생생한 연주의 현장은 바로 그 상실의 과정을 목격하는 장소”(p.112)라고 말하는 천희란의 글에는 짙은 상실감이 배어 있다. 듣는 저의 눈으로 볼 때『자동 피아노』에 쓰인 문장들은 음악의 흐름을 시시각각 쫓지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 p.122
“나는 여기에 혼자 있다.”(p.9) 이제는 고요해진 그곳에 발 딛고 서 있는 이는 어둠과 침묵 속을 더듬거리며 그 공간의 크기와 온도를, 풍경과 소리를, 빛과 어둠을, 그곳의 법칙을 가늠한다. 음악이 열어두고 떠난 그 공간은 “깨어 있는 동안에 꾸는 꿈”(p.12) 같은 세계다. 그곳에서는 무슨 사건이든 펼쳐질 수 있고, 무슨 이야기라도 말해 질 수 있다. - p.123
그런데 그 세계들을 오가며 끊임없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의 존재를 자각한 최초의 순간, ‘나’는 잊고 있던 자신의 고독을 떠올린다. ‘나’이기도 ‘너’이기도 ‘그녀’이기도 ‘그’이기도 한 그 고독한 자는 누구인가. - p.123~124
목소리
서양음악에서 목소리는 여성의 목소리인 소프라노와 알토, 남성의 목소리인 테너와 베이스로 구분된다. (중략) 선율은 사람의 목소리 대신 악기로도 노래될 수 있었다. 목소리 없는 음악에도 노래를 닮은 선율이 있었다. 가사도 목소리도 없지만 분명히 노래하고 있는 ‘무언가(無言歌)’처럼. - p.124
희고 검은 여든여덟 개의 건반을 지닌 피아노는 동시에 여러 개의 선율을 연주할 수 있다. 이 말을 조금씩 교묘하게 바꾸어보자. 피아노는 동시에 여러 개의 선율을 노래할 수 있다. 피아노는 동시에 여러 성부를 노래할 수 있다. 피아노는 동시에 여러 목소리들을 노래할 수 있다. 피아노는 동시에 여러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 피아노에는 여러 명의 목소리가 잠재한다. (중략) “정신을 구속하는 하나뿐인 신체와 끝없이 분열하는 목소리로 쓴다. 붙일 수 있는 이름의 수를 초과해 존재하는 목소리들에 대해 쓴다.”(p.81) - p.125
“다른 목소리. 또 다른 목소리. 끝없는 대화가 시작되어, 그의 주장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그를 두둔하기에 이르고, 이윽고 부정을 부정하며 꼬리를 문다. 도끼로 꼬리를 내리치려 하면 거기에 그가 누워 있고, 그는 도끼를 휘두르는 손의 의지가 누구의 것인지 의심하고, 누워 있는 그가 도끼를 쳐들고 있다.”(p.37) (중략) 쉼 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중언부언하고 모순을 말하며 죽고 싶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그럼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몇 번이고 밝힌다.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그것은 내 삶에서 무엇보다 치욕적인 사실이다.”(p.53). “죽을 수 있어서 안도했다. 그러나 문득 이 모든 생각이 살아서 하는 생각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p.57). 이것은 음악에 귀속된 성부가 아니라 신체에 귀속된 목소리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 125~126
자동 피아노
스스로 연주하는 피아노. ‘자동 피아노’라는 사물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서양음악계의 낭만적 세계관이 근대의 물결을 맞이할 무렵이었다. 오르간, 오르골, 건반악기 등 여러 악기들의 내부에서 뜯어온 기관들을 한데 결합해 만든 이 기계는 인간을 대신해 피아노를 연주해주는 특별한 장치였다. - p.127
죽음
나는 이 죽음에 관한 말들을 곧이곧대로 따라 읽는 대신, 이 문장에 의지해 그것을 비틀어 읽는다. “단언하겠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면, 죽이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p.27) 그러니 말하는 이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거듭 다짐하면, 죽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일 테다. 나는 거기서 안도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매번 그 연주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연주가 지속되는 만큼의 시간만을 살 수 있어서.”(p.116) 나는 이 스물한곡의 음악에 뒤따르는 죽음에 관한 글들을 그가 살아서 시간을 보낸 방식으로 읽는다. - p.131~132
--- 申 睿 瑟(신예슬) / 음악평론가
【작가의 말】
내가 노래를 연주할 때,
그 노래는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살사고가 지속되면 이따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도중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처음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두려움에 떨지만, 시간이 흐르면 내가 죽는 것을 생각해도 무덤덤해진다. - p.135
고통에는 얼굴이 없어서 누구에게로 가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표정의 얼굴이 된다. 삶이 정체되어 있다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현실적 조력이 필요하고, 그 조력 없이 개인의 의지는 자주 무력해진다. - p.143
각 장의 부제인 피아노 연주곡은 매 챕터를 쓰기 직전 즉흥적으로 정한 것이다. 당시의 감정과 생각을 부풀리는 음악을 선택해 들었고, 원고를 쓰는 동안에는 음악을 듣지 않았다. - p.144
<자동 피아노, 천희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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