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레플리카 LOVE REPLICA (윤이형 소설) - 5
러브 레플리카 (p.153~187)
그것은 가루, 색깔도 맛도 냄새도 없이 불균질적으로 흩어져 있는 가루 무더기에 가까웠다. 시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았고 경의 노력에 의해서도 움직이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p.153
시간은 경의 내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마른 시간들은 경의 팔다리를 타고 떨어져 혼란스럽게 뒤섞였고 젖은 시간들은 뭉쳐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 p.154
경을 생각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얼룩이다. 베이지색 스커트 위에 조그만 타원 모양으로 붉게 배어나오기 시작한 얼룩이 있고 스커트 아래로는 스타킹을 신지 않아 다소 추워 보이는 그녀의 두 다리가 있다. 내가 바라보자 얼룩은 마치 내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더 커졌다. - p.158
내가 원하는 건 정상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몸으로 갈아타는 것, 내가 아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다르게 사는 것이었다. 그 병 특유의 닫힌 논리가 자해적인 행동들을 아름답게 보이게 했고, 무엇보다 내게는 어린 시절 외모를 조롱했던 아버지를 비롯해 숱한 가해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 내가 내 몸을 아름답게 여기는 데 이 사회가 대체 무슨 도움을 주었단 말인가. - p.166
경은 말했지만 나는 생각했다. 저렇게 총명한 사삼의 마음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이다. 가끔 아무 징조 없이 연락이 두절되는 일이 있었고 시간이나 신 따위의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망상처럼 늘어놓는 일도 있었으나 내게 그건 병이라기보다는 경이라는 사람의 성격의 일부로 보였다. 간장을 넣고 오래 조린 반찬 같은 현실 속에 있어도 먼 곳의 일들을 생각하고 꿈꿀 수 있는 사람. 보통사람보다 예민하고 걱정이 많고 그래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 - p.167
나는 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괴로워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바닥 없는 구덩이에 빠지는 것 같은 그런 일을 겪었더라도 그건 그 사람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사람들 모두가 나눠져야 하는 짐이었다. 그런데도 경이 껴안고 다니는 피로한 강박을 나눠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71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고 울음이 시작되지만 그녀는 감히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고 그녀는 옆자리 남자의 손끝이 부서지고, 손바닥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손목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가 입고 있던 흰 셔츠가 바닥으로 펄럭이며 내려앉고, 바짓가랑이로 원래는 그였던 것이 빠져나오고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흙으로 변해 통로로 흘러나오는 것을 그녀는 가만히 보고 있다. (중략) 붉고 알갱이가 고운 흙이다. 검은 자갈과 반짝이는 조약돌 같은 것이 섞여 있을 때도 있다. 흙은 누군가 그 위에 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드문드문 젖어 있다. 점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물기가 충분한 것도 아니어서 그것을 한데 그러모아 빚는 일은 쉽지 않다. 경은 그 일을 하면서 중간중간 머리 위에 걸린 스크린을 올려다본다. 비행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운항중이고, 스크린에는 대륙과 바다와 조그만 비행기가 표시되어 있다. 목적지까지 남은 비행시간과 거리는 경이 바라볼 때마다 잘라낸 것처럼 줄어든다. - p.179~180
단상) 오늘도 생략 - 등장 인물과 내용을 한번 더 읽으면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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