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물빛향기 2020. 3. 21. 21:51

100)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시집<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1983)

 

 

===  생즉사사즉생(生卽死 死卽生)

☞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산다.

 

바람에 흔들거리며 흔들리는 상한 영혼이여!

흔들려 고통과 함께하고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털어버리고

하늘 향해서 흔들흔들 넘어질듯 다시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