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 청춘의 맛
라일락과 순대
라일락꽃이 필 때면 나는 순댓국이 먹고 싶다. 우리 동네에도 순댓국을 아주 잘하는 집이 있다. 이 집도 역시 순대의 부재로 순댓국의 진가를 발휘하는 집인데, 나는 가끔 혼자 가서 순댓국을 시켜 먹곤 한다. 들깨가 듬뿍 든 순댓국에 새우젓을 넣어 간을 맞추고 돼지 귀, 오소리감투, 애기보 등을 먼저 건져 먹는다. 시원하고 달달한 깍두기에 갓 무쳐낸 배추 겉절이가 입맛을 돋운다. 매운 땡초를 된장에 찍어 먹고 뽀얀 순댓국 국물을 훌훌 떠먹으면 뇌수가 타는 듯한 쾌감이 솟는다. 거기에 소주 한 병을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p.26)
■ 문장 분석
-소제목이 ‘라일락과 순대’네요. 비와 순대도 아니고 라일락과 순대라는 소제가 눈길을 끕니다.
-소제목을 지을 때 ‘라일락과 순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를 연결해도 재미있겠습니다.
-‘라일락꽃이 필 때면 나는 순댓국이 먹고 싶다’로 시작해 순댓국 먹는 부분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작문하실 경우 예를 들어 ‘장미꽃이 필 때면 나는 사골국물이 먹고 싶다’로 시작해 사골국물을 먹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써도 좋겠습니다.
-‘돼지 귀, 오소리감투, 애기보 등을 먼저 건져 먹는다.’ 순댓국에 들어간 재료명을 정확히 쓰고 있습니다.
-‘시원하고 달달한 깍두기에 갓 무쳐낸 배추 겉절이가 입맛을 돋운다.’ 순댓국을 먹을 때 입맛을 돋웠던 지점을 포착해 서술했습니다.
-‘매운 땡초를 된장에 찍어 먹고 뽀얀 순댓국 국물을 훌훌 떠먹으면 뇌수가 타는 듯한 쾌감이 솟는다.’ 이 문장으로 순댓국을 좋아하는 이유가 좀 더 명확하게 가늠됩니다.
-‘뇌수가 타는 듯한 쾌감이 솟는다’ 얼마나 맛있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입니다. 뇌수가 타는 듯한 쾌감은 뭘까라고 생각해보세요.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나이든 여자가 혼자 식당에서 순댓국과 소주를 시켜 먹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권여선 작가는 이런 시선을 자신은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때로는/ ~ 때로는 반복표현이 문장의 리듬감을 살려줍니다.
-이런 시선에 호기심/ 괘씸함/ 흘끔거린다/ 수상쩍다/ 불평등의 시선/ 귀여운 두려움 등의 어휘를 썼네요.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 남자들이 힐끔거리는 이유를 자기방식대로 해석해 ‘귀여운 두려움’이라고 일축해버립니다.
-역으로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남자들이 주는 불편한 시선에 ‘메롱’이라는 단어는 그들을 오히려 놀려주는 느낌을 전달합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 라는 표현을 썼네요.
-이런 표현을 보면 여자 혼자 순댓국과 소주를 먹는 게 쉽지는 않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로 마무리합니다.
-남자들의 시선이 다종 다기하더라도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는 누가 뭐래도 라일락이 필 때면 순댓국과 소주를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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