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에세이필사

오늘 뭐 먹지? (권여선 음식산문집) - 3

물빛향기 2020. 4. 2. 21:19

오늘 뭐 먹지? (권여선 음식산문집) - 3


젓갈과 죽의 마리아주


   첫 단식 이후로 나는 몇 년에 한 번씩은 단식을 한다. 단식을 하면서 내 속에 있는 오래된 서랍을 열어 이것저것 하나씩 꺼내 들여다본다. 내가 살아온 과거들을 차근차근 짚어보고, 지금 맺고 있는 관계들을 곰곰이 따져본다. 그러다 문득 달걀을 푼 라면이 먹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행복한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꿈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과오를 떠올리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내 곁을 떠난 사람들 생각에 슬퍼하기도 한다. 열무김치에 고추장 넣고 맵게 비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극히 사소한 이유로 화가가 되지 못한 것에 서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따위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감정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 속에 웅크린 채 언젠가는 내가 한 번 뒤돌아 보아주고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고아처럼 어리고 상처 입은 감정들이다. 내가 그렇게 해준 뒤에야 그것들은 비로소 조용히 잠이 든다.

   나는 단식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가끔 단식을 하는 게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삶의 급류에 휩쓸려 가다보면 갑자기 “중지!”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 있다. 휴가 때 사흘이나 나흘 정도, 아니, 주말에 하루나 이틀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단식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숲속의 빈터처럼 고요한 신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내가 단식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단식이 끝난 뒤에 꿀물처럼 다디단 미음 물을 먹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간장의 기막힌 간기에 매료되기 위해서, 죽과 젓갈의 새로운 조합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단식이 짧은 죽음이라면, 단식 후에 먹는 죽과 젓갈은 단연코 부활의 음식이다.(p.75)



■ 문장 분석

-작가가 이십 대 후반 첫 단식을 경험하고 가끔씩 단식을 한다고 합니다.
-‘단식을 하면서 내 속에 있는 오래된 서랍을 열어 이것저것 하나씩 꺼내 들여다본다.’ 작가는 단식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고 하네요.
-‘살아온 과거들을 차근차근 짚어보고, 지금 맺고 있는 관계들을 곰곰이 따져본다.’ , ‘내가 행복한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꿈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과오를 떠올리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내 곁을 떠난 사람들 생각에 슬퍼하기도 한다.’ 등의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는 문장들입니다.
-‘그러다 문득 달걀을 푼 라면이 먹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단식 중에도 먹고 싶은 음식들이 떠오릅니다. 그 음식과 생각들을 연결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해준 뒤에야 그것들은 비로소 조용히 잠이 든다.’ 자신에게 위로한 뒤 조용히 잠이 든다라는 문장이 평온하게 들립니다.
-‘삶의 급류에 휩쓸려 가다보면 갑자기 “중지!”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 있다.’ 단식을 하는 지점을 밝힙니다.
-‘숲속의 빈터처럼 고요한 신세계가 열릴 것이다.’라며 단식을 권하는 모습도 있씁니다.
-‘내가 단식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단식이 끝난 뒤에 꿀물처럼 다디단 미음 물을 먹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라며 단식을 하는 이유와 미음의 맛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단식이 짧은 죽음이라면, 단식 후에 먹는 죽과 젓갈은 단연코 부활의 음식이다.’ 압도적인 표현으로 에세이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