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에세이필사

오늘 뭐 먹지? (권여선 음식산문집) - 9

물빛향기 2020. 4. 6. 13:01

오늘 뭐 먹지? (권여선 음식산문집) - 9


졌다, 간짜장에게


내 경악에 관계없이 여자 매니저는 어느새 내 책을 꺼내 들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래전부터 팬이었다. 혹시 알은척을 하면 불편해하실까봐 안 하고 있었는데 이번 책은 너무 좋아서 읽다가 눈물이 났다, 그래서 사인을 받고 싶다,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보다 부끄럽고 당황하여 눈물이 났다. 오래전부터라니. 나는 오래전부터 지금의 꼴보다 더 안 좋은 꼴로 오직 간짜장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그 집에 온 적이 부지기수였고 팔보채의 전복 개수가 모자란다고 따진 적도 있고 간짜장이 빨리 안 나와서 직원을 닦달한 적도 있고 술을 먹고 큰 소리로 떠들어댄 적도 있고 또……아, 그만하자.(p.243)


요즘은 다시 간다. 간짜장의 완승이다. 그나마 팬을 의식하고 좀 덜 추하게 먹으려 해도 간짜장은 입가에 소스를 묻혀가며 면을 쭉쭉 빨아들여 먹는 게 제일 맛있으니 어쩔 수 없다. 이젠 제법 넉살이 좋아져 눈도 못 마주치던 여자 매니저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도 하고 포스트잇을 선물로 주면 고맙게 받기도 한다. 그래도 간짜장을 먹으러 갈 땐 좀 긴장이 된다. 반드시 세수는 하고 머리는 빗고 간다. 유명해진다는 건 이렇게도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더 유명해지기 전에 ‘권여선의 인간발견’이든 ‘오늘 뭐 먹지?’든 다 그만 쓰려 한다. 애독해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니 이제 각자 고민하시라. 오늘 어떤 인간을 발견할지, 오늘 뭐 먹을지는. 난 아무도 모르게 파묻혀 소설만 쓸 거다. 진짜다. <끝>(p.246)



■ 문장 분석

-작가가 단골로 갔던 중국집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간짜장이 맛있어 자주 갔던 집인데 가게 매니저가 작가에게 사인을 해달라는 장면입니다.
-‘내 경악에 관계없이 여자 매니저는 어느새 내 책을 꺼내 들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매니저의 눈은 빛나며 말했지만 작가는 경악에 찬 표정이 그려집니다.
-‘이번 책은 너무 좋아서 읽다가 눈물이 났다’는 매니저의 눈물과 ‘나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보다 부끄럽고 당황하여 눈물이 났다.’ 작가의 눈물이 상반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팔보채의 전복 개수가 모자란다고 따진 적도 있고 간짜장이 빨리 안 나와서 직원을 닦달한 적도 있고’ 팬인지도 모르고 꼴도 안 좋게 하고 가고 전복 개수를 따졌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아, 그만하자.’로 마무리하는데 이는 더 부끄럽다는 감정을 극대화시킵니다.
-‘요즘은 다시 간다. 간짜장의 완승이다.’ 부끄러워 가지 못하다 간짜장이 넘 먹고 싶다는 감정을 ‘완승’이라고 표현했네요.
-‘반드시 세수는 하고 머리는 빗고 간다. 유명해진다는 건 이렇게도 불편한 것이다.’ 불편한 이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유명해지기 전에 ‘권여선의 인간발견’이든 ‘오늘 뭐 먹지?’든 다 그만 쓰려 한다. 애독해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 인사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끝문장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