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1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간행의 말, 머리말, 추천사 부분을 요약
광주시민의 목소리를 담은 5 ․ 18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물 – 5 ․ 18을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광주사람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한다.
1997년 ‘12 ․ 12, 5 ․ 18 재판’ - 5 ․ 18은 특별법 제정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됐다. - 인류 역사에서 길이 빛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역사와 사람의 특징은 변화에 있다는 오랜 명제는 결국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힘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부는 광주항쟁이 여론화되어 대중에게 알려지는 큰 사건으로 번지는 것을 꺼린 것이다.
광주항쟁은 1980년대 군사독재에 대항하여 광범위한 저항을 만들어 냈고, 1990년대 한국사회가 이룩한 민주화의 길을 닦았다. 민주화는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가해자들에게 내란과 폭동죄를 물어 유죄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광주의 비극이 서울과 워싱턴 두 나라 정치권력의 합동작품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과 대한민국에 있는 8만 여명의 미군과 미군 기지들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봉쇄하고, 자본주의 동맹국을 서로 묶어두는 대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 군사 ․ 정치적 영향력을 공유하면서 동아시아에서 타이완과 한국의 오만한 독재체제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대신 미국이 보증하는 ‘경제동물’이 되었다.
시민사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1979년 10월 부마사태가 터지면서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그해 10월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를 암살했고, 뒤이어 12월에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980년 광주항쟁에서 대단원을 맞게 된 것이다.
제 1 부 밀려드는 역사의 파도
1. 10월에서 5월까지 (p.24~59)
부마항쟁과 10 ․ 26 사태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1분, 늦가을 주말 한가로운 초저녁이었다.
“탕, 탕, 탕 …”
청와대 부근 궁정동의 작은 골목 사이로 총성이 울려퍼졌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발사한 총탄은 유신독재를 붕괴시켰다.
1979녀 10월 16일 ‘유신정권 타도’를 기치로 부산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마산지역 시민과 노동자가 이에 참여하면서 순식간에 항쟁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정부와 미국의 긴급 대응
10 ․ 26사건 발생 6시간 뒤, 27일 새벽 2시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국가위기 관리가 시작되었다. 정부는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11월 8일 최규하 권한대행은 대국민 시국담화를 통해 유신헌법 개정과 정부 주도의 민주화 추진을 약속하였다.
미국의 선제적인 방호조치는 북한은 물론 중국과 소련도 긴장시킬 만큼 강력했다. 평소보다 훨씬 강화된 경계태세로 인해 북한의 남침이나 간첩침투 가능성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안개정국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현 등 재야인사들은 10 ․ 26사건이 치열한 민주화투쟁의 결과이며, ‘유신독재의 종말’이라고 규정하고, 즉각 민주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월 6일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여야 정치권은 최규하 과도정부가 유신체제를 변형시켜 유지할 속셈이라고 의심했다.
YWCA 시국집회와 최규하 대통령 선출은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안개가 자욱해서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의 상황, 소위 ‘안개정국’이 된 것이다.
12 ․ 12 군사반란
10 ․ 26 이후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는 ‘군부’의 움직임이었다.
12 ․ 12 군사반란은 단 하룻밤 사이에 전광석화처럼 진행됐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에게는 오랫동안 그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97년 대법원은 ‘12 ․ 12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이라고 판정했고, ‘정권찬탈을 위한 내란의 시작’이라고 규정했다.
군사반란세력의 집권계획
12 ․ 12쿠데타 성공으로 자신감을 갖게 된 전두환 등 군사반란세력은 자신들의 정권장악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제압하기 위한 준비를 곧바로 시작했다.
언론과 주요 정보기관, 국회, 행정부, 사법부 등 국가의 주요 기관을 순차적으로 제압.
K – 공작계획
1980년 2월 중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 소속 이상재 준위를 반장으로 하는 ‘언론대책반’을 보안사 정보처 산하에 설치하였다.
보안사 언론대책반은 ‘K-공작계획’을 만들었다. “고도의 보안이 요구 되므로 ‘K-공작’으로 명칭, 공작 수행과정에서 수정 및 보완이 필요할 때는 사전에 전두환 사령관의 제가를 득한 후 실시하라.”는 강조사항까지 자세하게 써놓았다.
충정훈련
충정훈련은 군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실시하는 공세적인 진압훈련이었다. 훈련계획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참모들이 작성하여 육군본부에 넘겼다.
신군부는 수도권 주위에 배치된 이른바 ‘충정부대’를 중심으로 강도 높은 폭동진압 훈련을 실시하였다.
미군의 작전통제권을 벗어난 부대로, 부마항쟁, 12 ․ 12, 5 ․ 18 등 정권이 정치적 위기에 봉착 할 때마다 시위진압에 투입됐다.
1980년 3월 4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대학가의 개학 시기에 맞춰 대대적인 충정훈련이 실시됐다. 특수 제작된 진압봉은 길이 45~70cm, 직경 5~6cm로, 경찰봉보다 크고 단단한 물푸레나무가 사용됐다.
공수부대는 돌격하여 시위대를 와해시킨 뒤 공포심을 유발하여 그들이 재집결하지 못하도록 시위 참가자들을 잔인하게 구타하고 주모자를 현장에서 체포하는 훈련을 했다.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
4월 14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하면서 두 개의 핵심적인 국가정보기구를 장악했다.
민주화운동 세력들
신군부가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준비태세를 갖춰간 데 비해 민주화운동 진영의 움직임은 더뎠다. 운동권의 흐름은 네 갈래였다.
첫째, 시사적인 상황에 민감하고 정치상황에 대응하는 힘이 가장 강력하던 학생운동권이다.
둘째, 유신독재 시절부터 투옥을 당하거나 자기희생을 치르면서 자연스럽게 결집한 종교인, 문인, 언론인, 교수, 청년 등 이른바 재야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있었다.
셋째, 김영삼 등 제도권 야당 정치인과 유신체제에 정면 도전하면서 끊임없이 제도권 진입을 목표로 한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정치권 인사들이다.
넷째, 1970년대 생존권 투쟁을 통하여 성장한 노동자, 농민, 빈빈 등 기층 민중운동이다.
민주화의 봄
1980년 3월 –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열기가 18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통치로 꽁꽁 얼었던 땅을 비집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민주화’는 이제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였다.
정치권은 헌법 개정과 민주화 문제를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원집정부제 권력구조로의 개헌을 선호했고, 국회는 정부 주도의 개헌 추진에 반대했다.
신군부는 정권장악 수순을 착착 밟아가고 있었다. 신군부는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의 경쟁이 ‘추악한 파벌싸움’이라며 여론조작에 나섰고, 글라이스틴 대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하게 밀어붙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전남지역의 역량
녹두서점(김상윤) - 각종 독서그룹을 통하여 학생운동가들을 배출했고, 다른 지역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교통 정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현대문화연구소 – 사회운동권의 결집을 모색 하면서 현장운동에 대한 접근을 꾀하였다.
그밖에도 여러 단체들이 민주화운동을 촉진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1980년 초 전남대 학생운동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활동하던 세력들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물줄기로 만들어 가면서 대중적 에너지를 흡수해 몸집을 불려나갔다.
엇갈리는 전망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무등산 자락의 식영정에서 광주의 운동권 인물 30여명이 봄맞이 야유회 행사를 가졌다.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옥바라지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송백회 등이 주선한 것이었다. 겉모양은 야유회였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짚어보고 향후 활동방향을 가늠해보는 자리였다.
폭풍전야
5월 2일 서울대의 ‘민주화 대총회’에 1만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하면서 민주화를 열망하던 일반 시민과 학생 운동권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대학생 대표자들은 전국 대학생들의 행동통일을 모색하기 위하여 ‘민주화 대행진’기간을 선포하였다.
재야인사들의 움직임도 활발 – 5월 7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3명의 공동의장 이름으로 민주화 촉진 국민선언문을 발표한다.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앞두고 거대한 물결을 이룬 민주화운동 진영은 학생운동을 선봉으로 마주 보고 달려오는 신군부세력과의 피할 수 없는 정면충돌을 예고했다.
‘시국수습방안’
대학가 시위의 초점이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등으로 모아지자 신군부는 5월 첫째 주부터 진압작전을 본격화했다.
‘시국수습방안’은 신군부의 5월 정권 장악을 위한 ‘사전모의’이자 ‘실행계획’으로, 권정달이 중심이 돼 보안사 참모들이 만들었다.
시국수습방안의 주요 골자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 세 가지였다.
‘학생시위 대처 방안’(육군본부 작전참모부)을 작성. - 4단계로 계엄 당국의 대응방안은 1단계(5.7~10) - 문교부 담화 발표 및 군 투입 준비, 2단계(5.11~13) - 포고령 발포, 3단계(5.14~15) - 학교 휴교, 4단계(5.17) - 계엄군 투입
육본은 5월 7일 이전부터 군대를 동원하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상정한 것이다.
‘학생들의 시위로 인한 사회혼란에 대처하기 위해 군이 나섰다’는 쿠데타 세력의 논리는 ‘5 ․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낸 허위 주장에 불과했다.
미국, 병력이동에 동의하다
5월 7일 워싱턴의 ‘체로키팀’에 한국으로부터 비밀전문이 도착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백악관에 보낸 전문의 제목은 ‘한국정부, 특전사 부대를 이동하다’였다. 신군부가 학생시위로 인한 우발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2개 공수여단을 서울과 김포공항 지역으로 이동시킨다.’는 사실을 주한미군 지휘관들에게 알려온 것이다.
12 ․ 12사태 이후 잠잠하던 군부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비밀 전문은 한국 군부가 “5월 15일까지 계엄령이 해제 되지 않으면 캠퍼스 밖으로 나와 시위를 벌이겠다는 대학생들의 선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전했다.
5월 8일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이 곧바로 답신을 보내왔다.
“우리<미국정부>는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한 한국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
5월 9일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을 만나 미국정부의 이런 뜻을 전했다. 글라이스틴은 외교관 특유의 우회적인 표현을 하였지만, 그 핵심은 ‘미국은 시위진압을 위한 군대 동원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조작된 남침위협설
신군부가 ‘소요사태’와 더불어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중요한 명분으로 삼은 것은 ‘북한의 남침 위협’이었다.
미국 정보기관은 5월 10일 중앙정보부가 보고한 남침설 첩보의 입수경로가 불분명하다며 이 첩보가 사실상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5월 13일 전두환은 한미연합사령관 위컴 장군을 직접 만나 “북한이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며, “남침의 결정적인 시기가 가까워졌을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위컴 사령관은 전두환에게 “미국이 한국 방위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북한 침공이 임박했다는 징조는 없다.”고 대답했다. 전두환을 만난 직후 위컴은 워싱턴에 “전두환 장군이 청화대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로 북한의 남침 위협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고 보고 했다.
5월 10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중앙정보부의 첩보내용을 분석한 결과 북괴의 남침 가능성이 없다고 밝혔다.
1급 비밀문건 – 1980년 5월 9일 열린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이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한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는 기미가 없다.”고 보고했다.
6월 2일일의 미국 국가정보위원회 극비문서에는 “현재까지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행동이 전두환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전두환은 첩보의 신빙성을 무시한 채 ‘북한의 남침’을 5 ․ 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첫째, ’대학생과 노동조합 및 불량배들의 민중봉기획책‘, 둘째, ’북한 비정규전 부대의 침투‘ 가능성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신군부의 선제공격
신군부는 임시국회 소집 이전에 ‘선제공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5월 17일 전격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국방부는 5월 14일부터 20일까지 7일간 ‘대간첩 작전태세 강화 지시’를 하달했다. 국내 소요사태와 관련해, ‘북한의 적극적인 대남활동 및 비정규전 위협이 예상된다.’는 이유였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전에 군부대 이동이 시작됐다.
북한의 남침 위협이 사실이라면 휴전선에 병력을 증원 배치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신군부는 대간첩작전이라는 명분 아래 휴전선이 아닌 후방지역에 시위진압 훈련을 마친 충정부대를 투입했다. 실제로는 ‘소요진압’이 목적이었음이 ‘소요진압 공지(空地) 협동작전 계획’ 지시에서 드러났다. 이 계획의 작전이란 ‘무장헬기 동원’을 명하는 것은 물론, ‘소요진압을 대간첩작전 차원에서 수행’하라는 군사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5일 후 광주에서 시행됐다.
김대중을 겨냥한 칼끝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열어 “만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과도기를 이용, 남한에 대해 어떤 무력에 의한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가 있을 때는 국민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앞장서고 전 국민이 일치해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총 단결, 투쟁하겠다.”고 선언했다. 바로 그 순간 칼끝은 김대중을 겨냥하고 있었다.
봇물 터지듯 물결치는 민주화의 요구
광주에서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서울보다 하루 늦은 14일부터 시작됐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서울 지역 대학생들의 가두진출 소식에 크게 고무돼 13일 오후 광주지역 7개 대학 학생대표자회의를 소집했고, 14일 오후부터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이 첫 가두진출에 나섰다.
전국 37개 대학의 학생들이 민주화 요구를 전면에 내걸고 봇물 터지듯이 한꺼번에 거리로 물결쳐 나왔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유신잔당 타도하자!’
광주에서 학생들의 본격적인 첫 시내 진출이 이루어진 14일 오후 2시 50분 전남대와 조선대 등 대학들은 물론이고 몇몇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1만여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도청 앞 광장을 빼곡이 메웠다. 학생들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도청 앞 광장에서 ‘민주화성회’ 의식을 진행했다. 학생들이 ‘비상계엄 즉각 해제하라!’ ‘정치일정 단축하라!’ ‘노동삼권 보장하라!’는 등의 주장을 토해내자, 주위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은 연설이 끝날 때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호응했다.
‘서울역 회군’
5월 15일 광주에서는 오후 2시 30분 도청 앞 광장에서 학생들의 집회가 열렸다.
이 시각 서울역 광장에는 35개 대학의 학생 10만 여명이 모였다. 13일부터 시작된 서울지역 대학생 시위의 열기가 사흘째 고조되면서 임계점에 다다랐다. 서울은 도심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매우 격렬하게 학생과 경찰의 충돌이 빚어졌다. 시위대에 의해 경찰차가 불타는 등 시위는 야간까지 계속 가열되어 다.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지방대도시의 24개 대학에서도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학생들의 의사가 정부에 충분히 전달됐고, 군 투입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이틀간의 대규모 시위에도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아 언제든 대대적인 시위를 다시 벌일 수도 있으니 일단 시위를 중단하고 학교로 복귀하자는 결정이었다. ‘서울역 회군’이 결정된 것이다.
5월 16일 광주의 ‘횃불시위’
5월 16일 금요일, 3일째를 맞은 민주화대성회는 전남도청 앞 광장에 3만여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됐다. 광주지역 학생운동 연합지도부는 이날의 시위를 이전과 달리 ‘횃불시위’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
5월 17일 드디어 ‘D데이’ - 전두환을 비롯 신군부 주요 인사들은 아침부터 바빴다.
전두환은 ‘시국수습방안’을 설명하고 군 지휘관들이 지지 결의를 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영복 국방부 장관 주재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시국수습방안’ 세 가지 가운데 ‘비상계엄 전국 확대’만 결의 되고, ‘국회해산’과 ‘비상기구 설치’는 군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반대여론을 의식하여 언급되지 않았다.
주영복 장관은 총리를 찾아 논의 내용을 보고, 총리는 계엄확대 여부는 대통령 결심사항이니 건의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국회해산’과 ‘비상기구 설치’는 군 지휘관들이 논의할 사항이 아닌 ‘정치적인 사항’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16일부터 학생시위가 정부 입장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기 때문에 한시름 놓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더욱 강경하게 대통령을 압박했다.
5 ․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17일 밤 9시 42분 신혁확 국무총리 주재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임시국무회의가 열렸다.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북한의 동태를 들먹이며 ‘계엄확대 선포’를 제안했다. 국무위원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찬반토론도 없었고, 8분 만에 의결됐다.
18일 새벽 0시 20분 계엄군은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앞세워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새벽 1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했다.
계엄포고령의 내용은 정치활동 중지, 집회 및 시위 금지, 대학 휴교, 언론보도 사전 검열, 파업 및 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이었다. ‘국회해산’을 대통령이 반대하자 신군부는 ‘계엄포고령’이라는 편법을 동원해 정치인 강제연행, 국회 점거 등 사실상 ‘국회해산’과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예비검속
17일 낮 12시경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소요 배후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가 있는 전국 각 지역의 보안부대에 전언통신문을 보내 이날 밤 10시를 기하여 대상자들을 일제히 검거하라고 통보하였다.
계엄군, 광주에 진주하다
17일 오전 10시 40분 진종채 제2군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에게 광주지역 8개 전문대학에 31사단 병력을 투입할 것을 지시했고, 이날 오후 5시에 전남대와 조선대에 천막이 설치됐다. 7공수여단은 광주로 향했고, 배치가 완료도자 교내 수색에 들어갔다.
육본의 지시를 받은 2군사령부는 7공수여단에 출동명령과 두 가지 지시를 하달했다. 첫째, 교내 기숙인원 귀가 조치, 둘째, 교내 주모자 전원 체포였다. 두 가지 지시를 무시하고, 교내에서 눈에 띄는 학생들은 무조건 체포하고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뒤 연행하였다.
탄압의 서곡
보안부대 예비검속팀은 녹두서점으로, 계엄군은 전남대와 조선대 정문과 후문으로 동시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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