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4
5. 무장투쟁과 승리의 쟁취 p.183
5월 21일 수요일 항쟁 4일째
20사단 증파
광주 시내 상황은 20사단 병력이 이동하는 동안에도 시시각각 변했다. 20사단은 광주시민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투입되었다. 21일 새벽 6시 25분 500MD 헬기 5대가 전교사에 추가로 내려왔다.
희생자의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21일 새벽 4시 무렵 광주역 맞은편 KBS 광주방송국이 화염에 휩싸였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광주역 광장은 불에 탄 차량의 잔해들이 앙상한 뼈대를 드러냈다.
시위대는 함성을 지르며 광주역을 향해 내달았다. 그러나 50미터쯤 앞에서 멈칫했다. 2구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밤새워 가두방송을 한 전옥주는 광주역에서 발견된 희생자 2명의 시신을 리어카에 옮겨 싣고 태극기로 덮은 다음 금남로에 있는 광주은행 본점 앞까지 1천여명의 시위대와 함께 행진을 벌였다. 전옥주는 시민들과 함께 리어카에 실린 2명의 희생자를 향해 묵념을 올렸다. 그때까지 계엄군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희생자를 확인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유언비어와 뒤섞여 떠돌던 소문이 현실로 드러났다. 그녀는 도청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어느 대대장 앞으로 다가가서 희생자의 시신을 보여주며 따졌다. 그러자 그 중령은 “계엄군이 죽인 것이 아니라 간첩이 나타나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계엄군의 앵무새 같은 억지스러운 변명에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부처님 오신 날’의 비극
21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자비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참담한 비극’이 광주를 엄습했다.
21일 새벽 2시경부터 광주에서 외부로 통하는 시외전화가 완전히 끊겼다. 고속버스와 열차도 시내로 진입할 수 없었다.
계엄군은 이제 도청, 전남대, 조선대 등만 겨우 지키고 있을 뿐 나머지 지역에는 전혀 통제력이 미치지 않았다. 경찰서와 파출소까지도 텅 비었다. 시민들에 의해 계엄군이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었다.
시민들은 동이 트자마자 차량을 이용하여 외곽지역 주민들을 시내 중심가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분노가 공포심의 임계점을 넘어서자 생존 본능이 거대한 집단적 공명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20사단 지휘 차량 14대 탈취
20사단은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시위대의 거센 저항에 부닥쳤다. 아침 8시 송정리역에 내린 20사단 61연대 소속의 장교와 사병이 차량 40대와 함께 전교사에 도착했다.
20사단 일부 병력과 장비가 고속도로를 이용해 광주에 도착했다. 화학대장 인솔 아래 이동한 사단장 전용 지프 등 지휘부 차량14대를, 광주공단 입구에서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3백여명의 시위대가 화염병으로 기습 공격하여 14대의 지프를 순식간에 모두 빼앗아버렸다. 군인들로부터 지프 14대를 빼앗은 시위대는 사기가 충천했다.
시민군의 장갑차
격분한 시위대는 21일 아침부터 광주 소식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광주 시내를 빠져나갔다. 시위대는 상무대 쪽과 서울 방향에서 군인들이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광주공단 입구와 돌고개 입구 등 주요 진입로를 폐타이어, 나무, 철조망 등으로 막아버렸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가서 차를 끌고 나오자고 말했다. 그곳에서 장갑차와 가스살포 차량을 끌고 나왔다. 56대의 군용 트럭을 포함해, 장갑차, 버스, 가스차, 지프 등 총 414대의 차량이 공장에서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고속버스와 시내버스, 각종 화물트럭, 승용차 등 일반 차량 529대, 공용 차량 83대로 총 1026대의 차량이 항쟁기간 중 시위에 동원되었다.
시민대표와 도지사 협상
도청 앞 공수부대는 대규모 차량시위에 이어 끝없이 밀려오는 시위대의 파상적인 공세에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밤중 내내 꼼짝 못하고 도청, 노동청 부근만 지키다 아침이 되자 병력을 집결시킨 뒤 도청 주위로만 방어범위를 좁혀 두텁게 경계 병력을 재배치했다.
시위 대열은 20일 저녁부터 전옥주의 가두방송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21일 아침 그녀는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 대대장에게 시내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의 요구사항은 ‘계엄군 철수, 연행자 즉각 석방, 폭력 사용 금지’등이었다. 잠시 후 최웅여단장은 ‘도청 사수 명령 상태에서 현재로서는 철수 불가, 체포자는 전원 경찰에 인계해서 계엄군이 보호하고 있지 않음, 시위대가 폭도화하지 않으면 일체 폭력사용 금지’ 등 계엄군의 대응방침을 알려줬다. 시위대는 더 이상 계엄군과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며 도지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간 협상대표는 구용상 광주시장과 만났다. 그 뒤, 장형태 도지사가 들어왔다. 협상대표는 시민들의 요구조건을 설명하고 수용해줄 것을 요구했다. 도지사 자신도 “시민들 못지않게 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 계엄군이 주둔하면 도지사에게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데 전혀 보고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도지사는 ‘공개 사과, 재발 방지 약속, 계엄 당국과 책임자 면담 주선’ 등은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계엄군의 시 외곽 철수와 연행된 시민, 학생들의 석방 및 소재 파악 문제는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했다.
파국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협상대표는 합의 된 사항을 도지사가 시위대 앞에서 직접 발표해달라고 요구했다.
전옥주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시민들이 몹시 불안해하고 있으니 ‘계엄군을 철수하고, 연행된 학생과 시민들의 소재를 파악해달라. 그리고 공정한 보도를 하도록 하고 계엄사령관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는 요구사항을 말했다. 도지사는 ‘12시까지 계엄사령관을 만나게 해줄 테니 나가서 시민들을 자제시켜달라. 그러면 5분 후에 나가서 시민들에게 사과의 말을 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시민들에게 협상내용을 말한 후 「아리랑」「선구자」등의 노래를 부르며 도지사를 기다렸다.
옥외 마이크가 준비되는 동안 도지사는 잠시 도청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지사가 나오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자 점차 분위기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시위 군중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공수부대와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녹두서점 모임
오전 11시 무렵 녹두서점에서는 어제 모인 윤상원, 정상용, 이양현, 정현애, 김상집 등이 다시 머리를 맞댔다.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소식지를 꾸준히 발간하기로 하고, 윤상원이 이끄는 들불야학팀이 그 일을 맡도록 했다. 또 녹두서점이 너무 노출되었으니 다른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추기경, 글라이스틴을 만나다
21일 오전 11시경 금남로에서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져가고 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에서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를 만났다. 추기경은 전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나 강경기류를 확인 후 미국만이 유일하게 신군부의 질주를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라이스틴은 이때 워싱턴의 국무성 고위관리들과 광주 무력진압 방안에 대해 심도 깊게 상의하고 있었다. 미국의 승인 아래 20사단은 21일 새벽 이미 광주에 도착해 있었다.
추기경은 내친김에 곧바로 군종신부를 통해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도 연락했다. 최종 명령은 계엄사령관이 내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둘은 명동성당에서 만났다. 추기경은 “최대한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사태가 남쪽으로 확산되면 무력 투입의 필요가 크지 않고, 만약 이것이 북쪽(서울쪽)으로 확산된다면 무력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도지사는 곧바로 윤흥정 계엄분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발포만은 삼가달라”고 호소했다.
전교사에 있는 최웅 11공수여단장에게 확인한 결과 ‘아직 철수 계획이 없으니 도청을 사수하고, 선무활동을 지속하라’는 내용이었다. 안중령은 ‘명령 없이 사격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실탄은 이미 분배된 상황이고, 조금씩 계엄군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시위대의 기세는 자못 위협적이었다.
분수대 앞 시계탑이 정오를 가리키자 긴장이 더욱 높아졌다. 시위대는 계엄군이 정오까지 퇴각할 것을 요구했고, 도지사가 그렇게 해보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정오가 지났지만 계엄군은 여전히 꿈쩍도 않고 그대로였다.
시위대와 계엄군의 간격은 서로 숨소리도 들릴 만큼 가깝게 좁혀졌다.
공수부대 장갑차에 깔려 군인 사망
오후 1시 즈음해서 시위대 대표가 공수부대에게 5분 내에 철수하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61대대장이 협상을 시도하며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는데, 화염병이 날아와 대기중인 장갑차에 불이 붙었다. 급히 장갑차를 후진시키는데 시위 군중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때 미처 피하지 못한 2명의 사병이 공수부대의 장갑차에 치였다. 계엄군의 장갑차가 급히 퇴각을 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친 것이다. 공수부대 장갑차의 ‘무한궤도’ 밑에 하반신이 깔린 그 병사가 상체는 위로 들려진 채 입에서 붉은 피를 쏟아내던 처참한 장면을 바로 곁에서 같은 부대 소속 이경남 일병이 목격했다.
공수대원 1천여명은 버스 2대와 장갑차의 기습을 받고 잠시 뒤로 물러났으나,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분수대 앞 광장을 장악했다.
애국가와 함께 시작된 집단 발포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다. 1시 이전의 발포가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이뤄졌다면 1시부터는 명령에 따라 ‘집단 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금남로는 순식간에 텅 비었고, 적막감이 감돌았다.
애국가가 채 끝나기 전에 한꺼번에 여러발의 총성이 울렸다. 탄피가 아스팔트 위에 툭툭 떨어지고 분수대 주변에 연기가 자욱했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사람들이 쓰러졌다.
인도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볼멘소리로 애국가를 불렀다. 숙연하고 비장했다. 이때 5~6명의 젊은이가 갑자기 큰길 한복판으로 뛰쳐나갔다. 도청 광장으로부터 3백여 미터 떨어진 금남로 한복판이었다. 시민들의 긴장된 시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의 머리, 가슴, 다리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태극기에도 피가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총탄은 주변 건물 옥상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대여섯번, 정말로 충격적인 광경이 반복되고 있었다.
‘우리도 총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공수는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처 어디서 총을 쏘는지 궁금했다. 수협 건물 옥상에 3명의 공수대원이 ‘서서쏴’ ‘무름쏴’ 자세로 조준사격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동구청 앞에서 김용대 자신도 총을 맞고 쓰러졌다.
- 피거품을 쏟으며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하다.
- 지나가던 사람들 가슴에 총탄을 맞고 사망하다.
- 엎드린 채 골목을 향해 기어가는 그를 엉덩이에 총을 맞았다.
시위대는 죽는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도심빌딩 5층에 살던 사람이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총탄에 맞아 숨졌다.
분노한 청년들이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한다.’며 무기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발포명령
21일 도청 앞 발포는 누가 명령했는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11공수여단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은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격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사격지시를 내린 사람도, 받은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11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는 당연히 기록돼 있어야 할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법원(1997)은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이고, 신군부가 “공수부대 병력을 동원하여 난폭한 방법으로 <광주시민의 시위를>분쇄한 것”은 ‘국헌문란’이라고 판시하였다.
‘자위권 발동’이라는 면죄부
‘발포명령’과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 ‘자위권 발동’이다. 발포명령이 발포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라면, 자위권 발동 주장은 ‘윗선’에서 포괄적으로 발포명령을 가능하게 하는 여건을 마편해주는 행위이다. 집단 발포로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사살한 가해자들은 ‘발포명령’을 은폐하기 위해 ‘자위권’이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전교사령관 윤흥정은 심야에 들려오는 집단 발포 총성을 듣고 사실 확인을 했으나 최세창 등은 발포 사실을 숨겼다. 2군사령부는 11시 20분경 예하 부대에 ‘발포 금지, 실탄 통제’ 지시를 내린다.
광주 현지에 출동한 지휘관들은 ‘자위권 발동’ 지시를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신군부가 무장한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한 이상 진압과정에서 발포행위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지휘체계 이원화
‘발포명령’에 대한 혼선은 ‘지휘체계의 이원화’와 연결돼 있다. 작전 지휘체계가 형식적으로만 ‘계엄사령부 ㅡ 2군사령부 ㅡ 전투병과교육사령부 ㅡ 31사단 ㅡ 3,7,11공수여단’ 등으로 잡혀 있었다. 공식적인 지휘체계와 달리 각기 보안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인 ‘전두환 ㅡ 정호용’으로 이어지는 별도의 지휘체계가 작동하면서 부대가 운용되었다는 ‘지휘체계 이원화’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분노가
천진한 소녀가 그의 눈앞에서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붉은 피로 물든 채 쓰러져갔다. 그는 그날 오후부터 두려움을 떨쳐내고 시위대에 적극 동참하였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피범벅이 된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어린아이를 어떤 사람이 붙잡고 있었다. 재빨리 옥상에서 내려가 그 아이를 데리고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갔다.
헬기 기총소사
21일 오후 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던 무렵 계엄군이 헬기에서 시민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했다는 주장이 여러 목격자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헬기에서 사격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의도적인 발포이지, ‘자위권’을 앞세워 발포 상황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급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먹잇감을 찾는 ‘맹수’, 저격병들
군용기와 경찰 헬기가 부상당한 공수대원과 중요문서를 여러차례 이송했다.
오후 2시 헬기에서 전단이 뿌려지고 있었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전단을 주워서 읽은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여 헬기에다 대고 공중에다 주먹질을 하였다.
2시 55분 별관과 수협 전남지부 옥상, 도심빌딩 위에 배치된 공수부대 저격병들은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몸을 숨긴 채 골목을 노려보았다. 행인이 얼씬거리면 조준사격을 퍼부었다.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도 공수대원들은 총을 난사했다.
일단 피신하는 민주인사들
도청과 직선으로 3백여 미터 거리에 있던 녹두서점에도 오후 1시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서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바짝 긴장했다. 녹두서점에 모여든 사람들은 서점이 정보기관에 노출돼 위험하기 때문에 불로동 광주천 옆에 있는 ‘보성건설’ 사무소로 옮기기로 했다.
유신정권 아래서 민주화운동 등 시국사건에 연루된 이력 때문에 자신들이 가장 먼저 체포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비장한 마음으로 ‘살아서 다시 만나자’며 서로 꽉 껴안은 다음 헤어졌다.
무기 분배
무기를 분배하는 시위대나 무기를 받는 시민들의 모습은 비장했다. 화순에서 무기를 가지고 온 시위대는 광주 지원동 다리와 학동 석천다리 부근에서 M1과 실탄을 분배하였다.
특공대 조직
시위대가 총기로 무장하면서 오후 3시경부터 시위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했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교전으로 바뀐 것이다. 계엄군은 M16 소총 등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 공수부대였다. 시위대는 카빈이나 M1 등 재래식 소총으로 무장하여 대항했다.
시위대는 총기조작법과 수류탄 사용법도 조를 나눠 교육을 받고, 기초적인 총기류 사용 교육을 마친 무장시위대는 특공대를 조직했다.
1조는 정찰, 2조는 도청 감시, 3조는 외곽도로 경계, 4조는 치안유지 등, 각각 별도의 임무가 주어졌다.
전남대 의대 병원 옥상에 설치된 LMG
시위대가 예비군 무기고에서 획득한 총기 가운데는 LMG (경기관총)도 있었다. 2정의 LMG가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되었다.
전남대 전투
21일 오전 금남로뿐 아니라 3공수여단이 주둔해 있던 전남대 앞으로도 시위대 수만명이 몰려들었다. 무더기로 연행된 시민들이 전남대에 억류돼 있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에 그들을 구출하자며 모여든 것이다. 오전 10시부터 모이기 시작한 시민들의 숫자는 정오 무렵 정문 쪽 4만여명, 후문 쪽 1만여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아시아자동차 등에서 노획한 차량을 앞세우고 정문과 후문, 농대 후문 등 세 방향에서 전남대를 공격하였다.
시위대와 계엄군이 대화를 시작했다. 요구사항을 말하고 결과를 알리는 방식으로 협상을 하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 계엄군은 ‘빼앗긴 차량을 돌려주면 철수’하겠다고 했지만 시민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임신부에게도 조준사격을
정오 무렵 전남대 앞에서 임산부 최미애를 비롯한 2명이 계엄군의 총탄에 사망하고 5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
보일러 수리공 안두환도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살고 있었는데, 21일 오후 집 안마당에 있던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던 중 변을 당했다. 현장을 목격한 딸들이 잠깐 밖에 나갔다 돌아온 엄마를 보자 엉엉 울며 말했다. “엄마! 군인 3명이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서는 화장실에서 나오시는 아버지를 방망이로 두들겨 팼어! 때리니까 아버지 머리에서 피가 계속 나왔어. 그래도 계속 패다가 질질 끌고 가버렸어.” 안두환은 끌려가면서도 울부짖는 딸들에게 자꾸만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게 그의 가족이 본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현지 지휘관들의 강경진압 거부
21일 오후 4시경 육군참모차장 황영시는 전교사에 있는 기갑학교장 이구호 준장에게 “전차 1개 대대, 32대를 즉각 출동시키라”고 전화로 지시했다.
황영시의 강경진압 지시를 광주 현지 지휘관들이 모두 거부한 것이다.
계엄군의 퇴각
21일 오후 광주에서 시위가 무장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계엄군 지휘부는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전환 배치해 광주를 봉쇄한 후 자위권을 발동하여 진압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공수부대는 장갑차를 앞세우고 노동청과 전남공고 앞을 거쳐 걸어서 조선대로 퇴각했다. 시위대의 공격을 우려해 도로 양측 건물 옥상에 사격을 하면서 빠져 나갔다.
퇴각하며 기관총 난사
공수부대는 11공수여단 본부가 있던 조선대에 도착했으나 잠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조선대 퇴각 후 재집결지는 화순 방면 길목에 위치한 ‘주남마을’이었다. 조선대에서 주남마을까지는 약 4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한 짧은 거리다.
조선대에서 퇴각하는 루트는 도로와 산길 2개로 나뉘었다. 치중대 등 차량을 이용하여 철수하는 부대는 학동 – 지원동 – 소태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이용했고, 나머지 병력은 조선대 뒷산을 넘어 도보로 피신했다.
장갑차는 지원동과 학동 사이를 왕복 질주하면서 총을 난사했다.
밀폐된 트럭에다 최루탄 터트려
21일 오후 퇴각 준비를 하던 3공수여단은 전남대로 붙잡혀온 사람들을 포승줄로 줄줄이 묶어서 밀폐된 트럭에다 실은 후 최루탄을 터트렸다.
트럭에 태워진 시민들은 최루탄 가스 때문에 코피를 흘리고 오줌을 쌌다.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저물었다. 그가 탄 트럭에서만 서너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 외에도 최루탄에 화상을 입어 얼굴이 벌겋게 벗겨진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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