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2
2. 산발적이고 수동적인 저항 (p.60~86)
5월 18일 일요일 항쟁 1일째
도화선
거리마다 침묵과 긴장이 감돌았다.
아침 7시경 도서관에 가기 위해 전남대 정문을 들어가려던 학생들이 교문에서 공수대원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계엄확대’ 등 정치상황 변화에 무관심한 채 취직시험이나 고시공부에만 전념하던 학생들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도심지 투쟁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대원들에게 쫓기며 삼삼오오 저항하던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시내로 나가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한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서로에게 “광주역에서 재집결하자”고 외쳤다.
시위대를 추적하는 헬리콥터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학생들에게 불리해졌다. 시민들은 분노했으나 감히 동참하지 못했다. 학생들은 금남로에서 차츰 밀려났다.
시위대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몰려갔다. 군부쿠데타와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지방으로 확산되기를 바랐다. 학생들은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쳐댔다.
학생 시위대가 터미널 로터리를 거쳐서 시민관 쪽으로 쫓겨 가는데 공중에서 헬리콥터가 시위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공중과 지상에서 서로 협동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공지(空地)협동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두 번째 도화선
헬기의 추격으로 시위대가 분산되면서 그 세력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어쩌면 시위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고 끝나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헬기의 추격을 피하여 계림극장부근, 탁구장으로 몸을 숨겼다. 전남대 앞 최초 시위와 마찬가지로 꺼질듯하던 시위가 오후에 다시 점화하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오후 3시 충장로 1가 학생회관 앞에서 다시 모이자’고 결의하였다.
시내에 나타난 공수부대
오후 3시 40분경 전남대를 출발한 33대대는 차량에서 내린 후, 4시경 유동 삼거리에서 450미터쯤 떨어진 북동 180번지 앞 횡단보도, 금남로 끝 부분 광주제일고등학교 교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도착했다.
독일병정처럼 절도 있게 전진하던 공수부대가 지휘자 구령소리에 맞춰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지휘용 군용 차량에 설치된 스피커가 울렸다.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불법시위에 가담한 자는 전원 체포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십시오.”
‘살인면허’라도 받은 듯
주위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충격에 빠졌다. 공수대원들은 무조건 닥치는 대로 서너명씩 달려들어 곤봉으로 패고 군홧발로 아무데나 차고 짓밟았다. 공수부대는 마치 ‘살인면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했다.
쑥대밭이 된 체육대회장
광주일고 부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철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총을 멘 채 진압봉을 든 상태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갔다.
이날 광주일고 운동장에서는 조선대 의대 동문 체육대회가 열렸는데 행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일부는 학교 교실로, 일부는 체육대회장으로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쑥대밭이 돼버렸다.
공수대원에게 두들겨 맞는 경찰
‘경찰’이 공수대원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애국가를 부르며 만세 삼창을 하다
동명동, 산수동, 일대 시위대는 아직 공수부대 투입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최초 희생자 청각장애인 김경철
5 ․ 18최초 희생자는 청각장애로 말을 하지 못하던 김경철이다. 18일 아침 김경철의 집에는 백일을 갓 지난 그의 첫딸을 축하해주기 위해 온 가족이 모였다. 18일 오후, 그날도 그들은 평소처럼 함께 일감을 찾아 시내 중심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 입구에서 갑자기 나타난 3~4명의 공수부대원이 김경철의 머리를 진압봉으로 후려쳤다. 그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반전의 조짐
오후 6쯤 계림동 부근에서는 청년과 학생 3백여명이 소규모 공수부대와 충돌했다. 지금까지 시위대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상황과는 달랐다. 공수부대와 과감히 부딪친 시위대는 좀처럼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정부 측 동향
18일 오후 4시 30분 최규하 대통령은 5 ․ 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관련하여 대통령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국가를 보위하고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하였다. 이 특별성명은 이날 오전 보안사에서 만들어준 초안을 기초로 청와대가 가다듬은 것이었다.
오전 11시 30분부터 12시 55분까지 계엄사령관은 사무실에서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와 한미연합사령부 참모장을 접견했다. 글라이스틴은 “미국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한국정부의 노력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계엄확대 조치에 대해 원칙적인 동의를 표명했다.
‘11공수여단’ 증파 결정
신군부 수뇌부들은 오후 1시부터 2시간 30분 동안 계엄사령관 주재로 오찬 회의를 열고, 광주에 추가로 공수부대를 투입할 것을 결정했다.
3. 적극적 공세로의 전환 (p.87~131)
5월 19일 월요일 항쟁 2일째
학생시위에서 민중봉기로
공수부대의 충격적인 진압 장면을 목격한 시민들은 지난 밤 공포에 떨며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고도로 훈련된 진압군은 야음을 틈타 공격준비를 더욱 강화했다.
공수부대의 진압은 어제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며칠 굶겨놓은 맹수가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를 발견 한 것처럼 시위 군중을 덮쳤다. 공수대원들은 돌멩이가 날아와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으면서 덮쳤다.
미도장 여관 난입 폭행
19일 10시경 금남로 3가에서 시위하던 검정 작업복 차림의 청년이 공수대원에게 쫓겨 가톨릭센터 건물 뒤쪽 미도장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인간사냥’
계엄군이 금남로에 나타나 시위 시민과 맞부닥뜨리면 우선 시민과 계엄군 간의 경계선이 없어졌다. 즉, 계엄군은 ‘콩을 땅바닥에 뿌렸을 때 콩이 사방으로 튀는 것’같이 각개 약진으로 시민 속에 침투, 남녀노소 닥치는 대로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단어는 ‘인간사냥’이었다.
현장을 취재했던 AP통신 테리 앤더슨(Terry Anderson) 기자도 “이는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고 말했다. 공수부대는 시위진압을 위해 폭력을 쓴 게 아니라 체포를 위해 폭력을 쓴 것이다. 17년 뒤 1997년 대법원은 “계엄군이 난폭하게 광주시민의 시위행위를 진압한 행위가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폭행, 협박에 해당” 한다고 판결했다.
부상자 운반을 돕던 경찰에게까지 곤봉을 휘둘렀다. 공수대의 잔인한 만행을 지켜보던 진압경찰의 간부 한사람은 충장로 주변 골목길에서 서성이는 시민들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면서 울먹였다.
18일 시위를 대학생들이 주도하였다면, 19일 오전 상황은 연행된 사람들 중 일반 시민이 절반에 이를 정도였다. 그만큼 시민들의 분노가 커진 것이다.
고교생들의 시위 참여
광주 시내 고등학교들은 오전부터 술렁거리다 12시를 전후하여 교내 시위에 돌입했다.
교내시위가 일어나자 대부분의 고등학교는 오후 3시경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은 귀가하도록 조치하였다.
생존 본능의 폭발
5월 항쟁은 진행과정에서 몇 번의 계기를 넘기면서 질적으로 고양되어 갔다. 이날 오후가 그 질적 비약의 첫 번째 계기이다. 19일 오전부터 시위대의 중심세력이 학생에서 일반 시민으로 옮겨갔다.
국가의 이름을 앞세워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공포심과 무력감을 조장해 집단적 굴종을 강요했다.
압도적인 국가폭력은 잠재돼 있던 민중의 원초적 생존 본능의 뇌관을 건들렸다. 뜻밖에도 민중은 자신들의 심연에 숨겨져 있던 생존 본능의 무한한 힘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둑판식 분할점령
공수여단은 금남로와 한일은행 앞에서 모든 병력을 집중하여 ‘다이아몬드형’으로 시위진압 대형을 갖춘 상태에서 강력한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공수부대는 데모 군중을 분리, 해산시키기 위해, 설대, 횡대, 종대, 다이아몬드 등 4가지 기본 대형을 유지하며 진압을 한다. 설대 대형은 시위 군중을 향해 부대원을 삼각형으로, 횡대는 도로가 넓을 때 일렬횡대로, 종대는 한 줄로 길게 세워 진압병력을 두텁게 하는 것이고, 다이아몬드형은 사방에서 데모 군중이 몰려올 때 사각형으로 대형을 유지하며 시위 군중을 막아내는 방법이었다.
무장공비를 토벌하듯 무섭게 달려드는 공수부대를 향해 시위대가 백병전으로 대항했다. 시위 군중이 모여 있는 장소는 ‘바둑판식 분할점령’이 진행됐다.
싸우다 죽자
광주공원 방면으로 퇴각한 시위대를 따라 공수대원들은 끝까지 추격했다. 공원의 오르막길에서 사태를 보러 나온 주부들까지 공수대원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이를 보고 있던 주위의 노인들이 공수대원의 폭력을 만류하자 그들은 노인들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쳤다. 이런 모습을 도망치며 바라보던 시위 군중이 갑자기 일시에 돌아섰다. “좋다. 우리 모두 다 죽여라!” 하면서 공수부대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전혀 예상치 않은 반응이었다. 갑자기 시위대가 거세게 반격해오자 추격하던 공수대원 7~8명이 기겁을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공용터미널 전투’ - 계엄군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갑차가 갑자기 정면으로 돌진해 나와 바리케이드를 부숴버리고 길 한복판의 시민들을 양쪽으로 갈라놓았다. 시위대가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공수부대를 실은 군용 트럭 10여대가 들이닥쳤다. 공수대원들은 시위대의 후면 공용터니미널 로터리 부근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발포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최초의 발포 상황이 발생했다. 사직공원 부근에 공수대원의 사체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조선대에서 출동한 장갑차가 위협 시위를 하면서 계림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장갑차 뚜껑이 열리고 M16총구가 나오더니 군인 한명이 고개를 내밀며 공중에다 총을 두발 쏘았다. 총소리에 놀라 다들 순식간에 흩어졌다. 누군가 ‘공포탄’이라고 외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순간 다시 총성이 울렸다.
광주의 눈물
땅거미가 덮이기 시작한 거리에 가랑비가 금남로에 내리는 비는 오후 내내 벌어진 살육과 혈전의 흔적을 지우면서 시민들의 비통함과 슬픔도 씻어 내렸다. 도심은 암흑이었다. 주민들은 어둠에 몸을 맡긴 채 황폐한 삶의 터전을 바라보았다.
훨씬 늘어난 ‘대검’사용
19일 공수부대의 진압은 18일에 비해 더욱 잔혹했다. 18일처럼 ‘진압봉’을 주무기로 사용했지만 ‘대검’ 사용이 훨씬 늘었다.
나라의 한편에서는 ‘집단적인 인간사냥’이 벌어지는데, 텔레비전에서는 다리를 흔들어대며 춤을 추는 출연자의 모습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강경진압을 주도한 정호용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광주에서 시위가 격렬해지자 강경대응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그는 공수부대가 초기에 강하게 진압하면 금방 시위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광주진압에 이렇듯 강경하게 나선 이유는 12 ․ 12쿠데타 때의 부재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는 지적이다.
정호용은 19일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7공수여단에 이어 11공수여단을 추가로 투입한 뒤, 20일 광주로 직접 내려왔다.
광주지역 기관장회의
‘광주지역 기관장회의’ 분위기는 어떠했던가? 이날 오전 10시경 상무대의 전교사에서는 윤흥정 계엄분소장이 긴급 소집해 군 ․ 관 ․ 민 방위협의회를 중심으로 광주 시내 주요기관장 회의가 열렸다.
윤흥정은 그 자리에서 31사단장과 공수부대 지휘관들에게 유혈진압을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지시하고, 회의 참석 기관장들에게는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정웅의 고뇌와 결단
정웅 31사단장은 ‘강경진압’을 멈추고, ‘무혈진압’으로 전환하라고 ‘31사단 작전 명령 제3호를 지시했다. ’대검사용 금지. 진압봉 머리 타격 금지, 분산 주력, 연행 금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장차 군법회의에서 사형당할 것을 각오”하고 “독단으로 강경진압 명령을 무혈진압 명령으로 사단작전명령을 변경시켜 하달”하였다는 것이다. 정웅 사단장의 각오는 비장했다.
상대는 ‘적’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야 할 ‘광주시민’이었다.
계엄군의 축차투입
18일부터 21일까지 매일 새로운 부대들이 ‘축차투입’된 것이다. 18일에는 7공수여단 2개 대대, 19일은 11공수여단 3개 대대, 20일은 3공수여단 5개 대대가 투입돼 공수부대만 3280명(501명/2779명)이었다.
2군사령부를 통해 전교사에 하달된 충정작전 지침은 ‘바둑판식 분할점령’이라는, 시위를 해산시키기보다는 퇴로를 차단하여 체포하는 데 중점을 둔 강경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군복을 갖춘 정규부대가 아니라 민간인 복장으로 시위대 속에 위장 침투하여 시위대 가운데서 주동자를 색출, 체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편의대’를 운용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전남북계엄분소는 2군사령관 훈시문을 접수하여 일선 부대에 시달하면서 계엄사의 방침과는 크게 차이 나게 다음과 같이 완화된 진압지침을 내려보냈다.
1) 계엄군의 이상적 행동을 강구할 것
2) 이적 행위자는 단호히 조치할 것
3) 선량한 학생 및 시민은 보호할 것
4) 군인의 기본자세를 견지할 것
5) 정부 재산을 보호할 것
3명의 베테랑 보안요원 투입
보안사령부는 광주지구 보안부대의 대응조치가 미흡하다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적에 따라 고위직 보안요원 3명을 광주에 파견했다.
이들 3명의 중량급 보안요원의 증원이 계엄군 증파와 더불어 이뤄졌다. 이들은 광주 현지에서 정보의 말초신경망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 특수부대 침투설
30여년이 지난 요즘도 광주는 여전히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있다. 5 ․ 18기간 동안 있었다는 ‘북한군 6백명 침투’라는 유언비어다. 간첩도 아니고, 북한 특수부대원 6백명이 항쟁기간 중 광주에 잠입하여 시민들 사이에 섞여 시위를 자극하여 폭동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요즘 유언비어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신 북한 특수부대가 공수부대와 광주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잔학행위를 주도 했는데, 이런 것들이 마치 공수부대의 소행인 것처럼 잘못 전해져오고 있다는 주장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행위가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해서 저지른 만행이라면 이를 막아야 할 임무는 국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군은 북한 특수군은커녕 단 한명의 간첩도 색출하지 못했다는 점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군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논리적인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보수논객으로 알려진 조갑제조차 ‘북한 특수부대 침투설’을 부인했다. 광주시민 수십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수백 명의 직업적 구경꾼들, 즉 내외신 기자들이 취재했지만,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 진압군 장교들 중 어느 한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
광주사태의 국가적 조사가 7차례나 있었지만 북한군이 대대 규모로 들어왔다는 증거나 정황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미국의 전력 증강
미국의 태평양지구 공군사령관 휴즈 중장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다.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전술 공군기들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한국 전선으로 출격할 것이며 어떠한 북한의 공중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국방정보국이 워싱턴의 합참본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19일자로 보냈다. … 이 전문은 광주 송정리의 미 공군기지에 주둔한 미군 정보장교들이 작성하여 미국에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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