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읽은책 발췌 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3

물빛향기 2020. 4. 10. 21:17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3


4. 전면적인 민중항쟁 (p.132~183)

520일 화요일 항쟁 3일째

 

3공수여단의 추가 투입

3공수여단은 낮에는 금남로 일대에 배치됐다가 어두워지면서 시위가 치열해지자 전남대 입구, 광주역, 광주시청 등 광주의 서북부지역 시위진압을 담당하게 되었다.

육군본부가 발행한 폭동진압작전 교범에는 진압대상이 일반적인 시위로서 물리적인 힘에 의한 진압이 요구될 시는 수적으로 우세한 보병부대를 요청하고, 소요사태가 극렬화하여 무장폭도들이 특정시설을 거점으로 항거할 시는 특공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특수부대를 요청한다.”고 명시돼 있다.

계엄 당국은 이를 무시한 채 맨 마지막 단계에서나 투입해야 하는 공수부대를 가장 먼저 출동시켰다.

 

두 번째 희생자 김안부

아놀드 피터슨(Arnold A. Peterson) 목사는 아침 8시 양림동에 머물던 전도대회단과 광주기독병원에 예배를 드리러 갔다. 피터슨 목사는 미국 침례교 선교사로 1975년부터 광주에서 선교활동 중이었다.

최초 희생자 김경철에 이어 두 번째 사망자였다.

시청 상황일지에는 “19일 오후 630분에 광주공원 광장에서 공수들이 대학생 8명을 팬티만 입힌 채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을 주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안부는 그 시간쯤 광주공원 근처 시위 행렬에 합류했거나 구경하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알몸에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치고

금남로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잡아서 옷을 벗겨 때리고 기합 주는 모습이 여러 사람 눈에 목격됐다.

가톨릭센터 6층에서 조비오 신부도 내려다보고 있었고, 교구 사무실에서는 수녀와 일반 직원 들이 보고 있었다. 이때 조신부는 내가 비록 성직자이지만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뒤에 군법회의 법정에서 진술했다.

 

전두환을 만난 김수환 추기경

언론의 외면 때문에 외부와 단절된 채 외로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던 광주시민들은 처참한 상황을 외부세계에 알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20일 오전, 김수환 추기경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갔다. 19일 오후 광주에서 올라온 윤공희 대주교를 통해 공수부대의 유혈진압 소식을 전해 듣고서, 곧바로 실권자 전두환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든 유혈사태는 막아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광주에서 사태가 시시각각으로 악화되어간다는 내용의 보고였다. 전화 때문에 이야기가 계속 끊겼다.

 

고등학생들도 유인물 뿌려

20일부터 광주에는 신문도 들어오지 않았다. 관제언론과 계엄군의 선무방송, 삐라, 근거 없는 유언비어 등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유인물 작업팀의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유인물은 주로 대학생들이 제작했다.

고등학생들도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

 

군법회의 회부협박

정웅 31사단장은 19일 밤 무혈진압 지시를 내린 이후 20일 오후부터 작전지휘관을 박탈당했다. 공식적으로 공수부대 지휘권이 31사단장에서 전교사령관으로 넘어간 것은 21일 오후 4시였지만 그 하루 전에 이미 공수부대가 그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들로부터 아무런 보고도 받지 않는 상태였다.

정호용 사령관과 더불어 특전사 작전참모 장세동 대령은 권총을 차고 상황실로 찾아와 자신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했으며, 전교사에 파견돼 있던 보안부대 김모 소령도 협력하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어린 꼬마의 손을 잡고 나온 할머니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시위는 금남로 외곽에서부터 시작하여,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치원에나 다닐 법한 어린 꼬마의 손을 잡고 나온 할머니로부터 술집 여자로 보이는 아가씨들, 점원, 학생, 봉투를 든 회사원, 가정주부, 요식업소의 종업원 등 전 계층, 전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더 이상 피하거나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차라리 우리 모두를 죽여라!”고 절규하면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공수부대 지휘자는 농성 중인 군중들을 향하여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시위 군중들이 더욱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공수대원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무자비하게 진압봉을 휘둘렀다. 농성장은 일시에 피투성이가 되었고 군중은 어지럽게 흩어졌다. 공수대원들은 골목까지 쫓아오거나 대검으로 쑤시지는 않았다. 더 이상 시위대를 추격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소수의 공수대원이 추격하면 골목으로 쫓기다가도 시위대가 갑자기 돌아서서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 빈발했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읍시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먼저 가신님들과 같이 죽읍시다!”

시위대의 사기가 한꺼번에 고양되면서 투석전이 치열해졌다. 도청 앞 광장으로 통하는 여섯 갈래 방향의 도로를 따라서 시민들의 대열은 물결처럼 밀어닥쳤다. 시위대는 맨 앞줄에 드럼통이나 대형화분을 눕혀놓고는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향하여 이를 밀면서 한걸음씩 나아갔다. 이제 구경만 하거나 방관하는 시민은 거의 없었다. 모두 결사적이었다.

 

택시 기사들의 봉기

저녁 7시쯤 갑자기 유동 쪽에서부터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돌진해왔다.

항쟁의 결정적인 비약이 이루어지는 두 번째 계기였다. 첫 번째는 19일 점심 무렵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였다. 그때는 시위 군중들의 분노가 집단적으로 폭발했지만 즉흥적이고 비조직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는, 20일 저녁의 대규모 챠량 시위는 조직적이었다. 자발적이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시위였지만 운수노동자들의 강력하고 일체화된 행동에는 강한 폭발력이 응축돼 있었다. 민중 스스로 역사의 전면에 자신의 온 생애를 던지는 순간이었다.

20일 오후 2시경 광주역 부근에 10여대의 택시가 모여들었다. “우리가 영업하다가 손님을 실어준 것이 무슨 죄길래, 죄 없는 운전기사들을 공수부대가 때려 패고 죽이느냐.” “우리를 이런 식으로 곤봉과 대검으로 살해 한다면 더 이상 영업을 집어치우고 싸워야 한다.” 흥분된 의견들이 오고가는 사이에 택시는 20여대로 불어났다. 기사들의 분노는 조직적으로 대응하자는 방향으로 모아졌다. 택시 기사들은 시내 곳곳을 운행하면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만행을 누구보다도 많이 목격할 수 있었고, 그들 자신 역시 피해가 켰다.

차량들은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돌진했다. 차량 행렬의 맨 앞에는 대형 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가 서고 그 뒤를 택시들이 뒤따랐다.

 

시위대, 군인들과 육박전을 불사하다

차량 행렬이 금남로에 이르자, 저지선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철통같은 저지선 앞에서 더 이상 어쩌지 못한 채 교착상태에 있던 시위 군중들은 엄청난 지원군을 만난 듯 열광했다.

공수부대는 버스의 유리창을 방망이로 두들겨 깨고는 창문 안으로 최루탄을 집어넣었다. 최루가스로 정신을 차릴 수 없던 차 안의 사람들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콧물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유리창으로 나오자마자 무자비하게 온몸을 짓밟혔다.

 

군경 저지선에서 속출하는 희생자

차량을 엄호하던 시민들은 구석구석에 몸을 숨기고 계엄군의 저지선을 향하여 돌을 날렸다. 공수대원들은 날아오는 돌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왔다. 밀려든 차량들은 서로 부딪히며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군경은 저항하는 시위대를 차량 대열의 끝까지 밀어붙였다. 시위대는 군인들과 육박전을 벌였다. 비명과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수십 명의 시민들이 도청 안으로 끌려갔다. 20여분간 계속되던 격렬한 충돌이 끝났다.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자신들이 살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날 밤중 내내 공수부대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밤을 새워야 했다.

 

참상을 사실대로 보도하라

저녁 740분경부터 약 50분가량 도청 앞 금남로에서는 격렬한 충돌 이후의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저녁 745분경 MBC를 둘러싼 시위 군중 5천여 명은 저녁 ‘8시 뉴스시간에 광주 상황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지금 밖에서 진행되는 모든 참상을 보도할 것을 거세게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830분경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다.

성난 군중에 의해 방송기자재가 파손되는 바람에 방송이 완전 중단되었다.

전남매일신문사(20) 기자들은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줄도 쓰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방송사를 공격한 시위대는 노동청과 학동, 충장로 입구에서 길을 가득 메운 시위 군중들과 합류하여 다시 도청 광장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시위 행렬은 주변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 관공서의 유리창 등을 몽둥이로 깨부수면서 나아갔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그곳에 운집해 있던 1천여명의 다른 동네에서 온 시민들과 서로 환호하며 합류하였다.

야간 접전이 치열해질수록 양측의 사상자는 늘어갔다. 도시 전체가 암흑의 용광로로 변했다. 분노와 격정, 비명과 환희, 삶과 죽음이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도심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노동청 앞에서 경찰 4명이 사망하다

시위 군중들은 치열한 투쟁과정에서 스스로 무기를 창출해냈다.

외부지역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버스나 트럭, 승용자의 운전기사에게 광주 상황을 설명하며 시내로 들어가 시위에 합세해주길 요청했다. 서울에서 오는 차는 장성을 지나 운암동, 무등경기장을 거쳐 광주역 근처의 고속버스터미널로 들어왔다.

920분경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돌진하는 광주고속 버스에 깔려 경찰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가스탄이 쉴 새 없이 시위대를 향해 날아왔고, 시위대의 돌멩이가 우박처럼 계엄군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MBC 방송국 방화

10시경 MBC 부근에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MBC가 불길에 휩싸였다. 건물 뒤쪽에서 시작된 불길은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다. 온 시가지가 훤하게 밝아졌다.

이때까지도 MBC 뉴스에는 단 한마디도 광주 상황이 보도되지 않았다. 계엄 당국의 발표만 되풀이되고, 오락프로그램만 방영되었다.

 

심야의 혈투

11시쯤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 전지역이 사실상 시위대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최웅 11공수여단장은 예하 부대 모든 병력을 도청 앞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이날 밤 광주역에서 집단 발포 소리가 들리자 도청 부근에 있던 11공수여단 일부 대대장들이 실탄을 분배했다. 각각 중대장들에게까지 경계용 실탄 15발이 든 탄창 1개씩을 지급했다. 육군본부의 폭동진압작전 교범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시위 진압을 할 때 실탄을 개인에게 보급해서는 안 된다.

11공수여단 대대장들은 동료 대원이 다치고 광주역 쪽에서 총성이 들리는 등 상태가 악화되어 병사들이 불안해하자 심리적 안정을 위해 실탄을 분배했는데, ‘함부로 사용하지는 말라고 지시했다. 인명살상용 실탄의 분배는 곧 발포로 연결될 소지가 커서, 실탄 지급은 상부에서 엄격하게 통제한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공수부대는 최루탄이 동이 난 지는 오래고 오진 진압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공수부대 병력과 수만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야간에 패싸움하는 듯한 상황이었다.

누구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허망함때문이었다.

 

혜성처럼 나타나 가두방송을 하는 여성들

이날 밤 도청을 사수하던 계엄군을 심리적으로 가장 괴롭힌 것은 시위대를 독려하는 날카롭고도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용달차에 매달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입니까? 경찰 아저씨, 당신들은 우리 편입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도청 광장을 잠시만 비켜주면 우리는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물러나겠습니다. 경찰 아저씨, 최루탄을 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맨주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이깁니다. 시민 여러분, 모두 힘을 합칩시다. 끝까지 물러서지 말고 광주를 지킵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옥주(31)와 차명숙(19)이고, 그녀들의 뛰어난 호소력은 시민들의 분노를 행동으로 이끌어냈고 계엄군에게는 심리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시위대를 향해 실탄까지 발포되는 격렬한 상황에서 전옥주의 방송은 광주역 근처 시위대의 사기를 드높였고, 3공수대원들의 귀에 선명한 각인을 남겼다.

 

광주역 전투

20일 밤 광주역 전투금남로 전투에 이어 사실상 5 18항쟁의 최고 정점을 이루었다. 5 18 기간 중 최초의 집단 발포가 이날 밤 광주역에서 발생했다. 최소 5명 이상의 시민이 이날 밤 목숨을 잃었고 상당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광주역 전투는 오랫동안 사건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베일에 싸여 있었다.

광주역은 도청과 마찬가지로 도심 교통의 중심지로 상징적인 장소다.

오후까지는 공수대원이 쫓고 시위대가 쫓기는 처지였다면 택시 기사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차량 공격이 시작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무인 차량공격

광주역의 3공수부대를 향한 시위대의 무인 차량공격은 운전자가 트럭의 가속기에다 돌이나 쇠뭉치 등 무거운 물건을 동여맨 다음 최대한 경계선에 가까이 차를 몰고 가서 운전대를 고정시킨 채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돌진하던 차가 분수대를 들이받거나 경계 중인 공수대원을 향하다 도로 턱이나 건물 담벼락에 부닥쳐 멈추곤 했다. 뒤이어 달려가던 차들이 그 뒤를 덮치며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무인 차량 공격은 공수대원들에게 공포그 자체였다. 공수대원들은 누군가 차 온다!”고 외치면 도로 위에 있다가도 급히 인도로 피했다. 멍하게 서 있다가는 차에 치여 죽을 판이었다. 그러나 무인 차량은 공수대원에게 심리적 위협은 되었어도 실질적인 위협은 되지 못했다.

 

휘발유 불기둥 치솟아

공용버스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향하는 모퉁이 주유소에서 청년들이 트럭에다 드럼통 2개를 싣고 휘발유를 가득 채워서 불을 붙인 뒤 한 청년이 차를 몰고 광주역을 향하여 질주해나갔다. 청년은 계엄군 전방 20여미터쯤에서 밖으로 뛰어내렸고, 트럭은 그대로 불덩이가 된 채 돌진하여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광주역 앞 광장의 분수대를 들이받았다. 휘발유 드럼통이 폭발해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10시 공수대원 1명 최초 사망

10시경 상무대에 머물고 있던 최세창 여단장은 무전을 타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부상 소식과 대대장들의 다급한 보고를 받고 3공수여단 모든 병력을 광주역으로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16대대가 방어하던 신안 사거리에서는 시위대의 화물트럭에 깔려 공수대원 1명이 사망했다. 10시가 약간 지난 시각, 5 18 기간 중 최초로 사망한 계엄군이었다.

 

최초의 집단 발포, 누구의 명령으로 누가 했는가?

동료가 시위대에게 희생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계엄군의 대응이 훨씬 과격해졌다. 대대장들은 무전으로 실탄 지급을 요청했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은 위협사격용으로만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에 사용할 때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실탄을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이때가 밤 1030분경이었다.

최세창 여단장은 최대한 발포를 자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하지만 실탄 분배는 발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시위 대열의 선두는 죽음이 지척에 와 있음을 직감했다. 시위대는 계엄군을 사방으로 포위한 채 시시가각 조여들었다.

광주역 광장은 순식간에 싸늘한 분위기가 엄습하며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M16 자동소총의 연발사격 소리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면서 콩 볶듯이 울려 퍼졌다. 심야에 발생한 최초의 집단 발포순간이었다. 선두에 섰던 청년들이 픽픽 쓰러졌다. 다시 또 연발사격의 총소리. 출렁이던 거리는 어둠속에서 갑자기 얼어붙었다.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누가 발사했는지는 아직까지도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군의 문서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일절 남아 있지 않다.

 

전교사령관 공수부대의 시 외곽 철수건의

11시경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해서 공수부대의 시 외곽 철수를 건의했다. 공수부대를 외곽으로 철수시키지 않으면 시민과 군 간에 유혈충돌이 발생하여 많은 피해가 예상되므로 부대를 외곽으로 철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승인해달라는 전화였다.

11202군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 실탄 통제, 3개 공수여단의 임무를 제20사단에게 인계(교대) 검토, 특전사부대 대대 단위로 분산 집결, 선무공작을 위한 홍보활동 강화등의 작전지침이 전교사에 발포한 후에 이뤄진 조치였다. 집단 발포가 있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상부에서 급하게 내린 지시였다.

11대대가 선발대로 통로를 개척하며 시작된 광주역 철수 작전은 새벽 2시부터 시작돼 새벽 430분에야 전남대로의 퇴각이 완료됨으로써 무려 2시간 넘게 걸렸다. 철수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공수부대가 앞을 가로막는 시위대를 돌파하기 위해 진압봉으로 구타하여 1명이 사망하고, 중상 3, 경상 1명이 발생했다.

 

불길에 휩싸인 광주세무서

21045문장우는 수백명의 시위대와 합세하여 광주세무서로 향했다. 세무서 정문 양쪽에서 경계를 서던 2명의 공수대원은 시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세무서 쪽으로 물밀 듯이 몰려들자 그 기세에 놀라 건물 안으로 쫓겨 들어가면서 총을 쏘았다.

한참 후 총성이 그치자 시위대는 세무서 정문을 박차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한편, 20일 오전 9시경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상도동 자택에서 발표했다.

계엄 당국은 의원들의 출입을 강제로 막아 임시국회 자체를 무산시켜버렸다. 이날 104회 임시국회를 열어 계엄해제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었다.

정부는 이날 신현확 총리 후임으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를 임명하였다. 언론은 그때까지도 광주지역의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