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읽은책 발췌 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5

물빛향기 2020. 4. 11. 20:1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5


6. 항쟁의 확산 (p.227~245)

 

21일 오전 시위대는 아시아자동차 공장과 고속버스 회사 등에서 대거 쏟아져 나온 차량을 타고 전남 도내 각 시와 군으로 내달렸다. 광주 소식을 주변의 농촌지역에 알리고, 지원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시민들이 확보한 차량은 시위의 기동성을 높임으로써, 시위의 범위를 일시에 확산시켰다.

21일 오전까지 나주, 화순, 담양 지역에는 시위 차량들이 광주 소식을 알리며 돌아다녔지만 아직 시위대가 무장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광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급격하게 달라졌다. 마른 풀섶에 성냥불 붙인 듯 순식간에 시위대가 무장을 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무기를 가져옵시다!

오후 1시경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시민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 소식은 빠르게 전파됐다. 광주 상황을 알리고 합세할 사람을 모으기 위하여 오전 일찍부터 차를 타고 시외로 빠져나간 시위대에게 집단 발포 소식이 전달됐다. 자주, 화순 등지에서 그 소식을 접한 시위대는 곧바로 가까이에 있는 경찰서나 예비군 무기고로 방향을 틀었다.

 

나주

오후 2시경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가 격앙된 어조로 계엄군의 발포 사실을 전했다. 계엄군으로부터 광주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화순

화순에서도 나주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오후 2시가 넘자 광주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시위대가 숨가쁘게 너릿재를 넘어왔다.

광주에서 시위 차량 수십대가 화순에 도착했다. 시위대는 흥분한 목소리로 광주 소식을 전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무기고의 위치를 물었다. 일부는 화약을 구해야 한다면서 화순광업소 위치를 물었고, 또 몇 대의 차량은 보성 쪽으로 출발했다.

 

영암

521일 점심 무렵, 영암군 신북 삼거리에는 각목을 든 시위대를 가득 실은 시외버스 1대와 스피커를 단 지프가 도착했다. 광주에서 출발하여 나주를 거쳐 영암까지 내려온 시위 차량이었다. 지프 앞좌석에서 여고생이 애절한 목소리로 광주 상황을 알리며 동참을 호소하였다. 영암지역 주민들은 빵과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등 적극 동조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위대는 아직 무장하지 않았다.

 

강진 해남 완도

21일 오후 4시경 3대의 버스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강진읍에 도착하여 구호를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자 수많은 강진읍 주민들이 나와 환호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5시경 강진경찰서 무기고에서 총기 100여정을 획득한 후 차량 5대에 나누어 타고 저녁 7시까지 광주로 돌아가기 위해 강진을 떠났다.

오후 3시경 광주에서 온 시위대와 약 3천여명의 군중이 해남읍 성내리 소재 교육청 앞 광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해남읍 교회에서는 목사를 필두로 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활동을 하였다. 여신도 회원들은 김밥 등 먹을 것을 준비하고 청년회와 남신도 등 교인들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서 시가행진에 참여하였다.

 

장흥 보성

장흥에 시위대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22일 오전이었다. 광주에서 온 시위 차량은 강진에서 21일 하룻밤 머문 뒤 장흥에 들른 것이다.

보성지역에 시위대가 처음 나타난 시각은 21일 저녁 8시였다. 총이 아니라 각목을 든 시위대가 택시 2대와 트럭 10대에 나누어 타고 80명은 장흥 쪽으로 30명은 보성역 방향으로 이동했는데, 이들은 보성에서 시위를 전개하다 일부가 트럭 3, 택시 2대로 벌교 쪽으로 이동하였다.

 

함평 영광 무안

21일 오후 1경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대에 분승한 광주의 시위대가 함평읍에 도착하자 함평읍 주민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하며 시위를 벌였다.

영광에도 시위대가 다녀갔지만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무안지역 주민들은 시위대와 합세하여 구호를 외치며 무안군 일대를 돌아다녔다.

 

목포

구호를 외치며 목포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 소식을 들은 목포시민들은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했으니, 삽시간에 1만여명이 목포역 광장에 운집하였다.

군중들은 유달산에 위치한 KBS 방송국에 들어가 대민 방송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시 나왔다. 광주에서 온 시위 차량은 상당수의 목포 청년들을 싣고 다시 광주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광주 담양

담양경찰서도 이날 낮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10대의 차량에 탑승한 50여명의 시위대는 미리 준비해 간 쇠파이프로 경찰서 유리창을 부수고 무전기와 무기를 획득했다.

 

 

 

 

7. 봉쇄작전과 민간인 학살 (p.246~269)

521 ~ 24

 

21일 오후 5시경 광주 시내에서 퇴각한 공수부대는 곧바로 광주시 외곽의 주요 도로를 봉쇄하였다.

신군부는 가장 큰 관심사는 시위가 서울로 확산되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만약 광주시민의 집단항거 사실이 서울 등 타 지역에 알려지면 민심이 어떻게 폭발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계엄군은 초기 진압작전 실패 후 전면적인 외곽봉쇄 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계엄군이 봉쇄한 지점은 광주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출입구와 같았다. 이 길목을 차단하면 광주는 외부세계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 빨갱이구나

21일 밤 9시 계엄사령부는 20사단 60연대를 추가로 광주에 급파하였다. ‘육작명 80-23에 따라 60연대 병력 1649(87/1562)은 서울 성남비행장에서 출발하여 22일 아침 7시 광주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전남대 교정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에는 붉은 글씨로 김대중 석방’ ‘전두환 물러가라’ ‘농민수탈 금지등이 거칠게 적혀 있었다. ‘붉은 색 글씨를 보는 순간 그는 용공분자들의 활동이라고 쉽게 믿어벼렸다. “내가 지키는 이 국토에서 어떠한 용공적인 준동도 용서할 수 없으며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계엄군 지휘부는 극도로 통제된 상황에서 정보조작을 통해 광주에 투입된 병사들에게 적개심을 주입하였다.

 

예고 없이 도로 차단

오후 5시 무렵까지는 시위 차량들이 광주에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사단의 배치가 완료되자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계엄군의 봉쇄작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시위대가 차량으로 이 지역을 통과하던 중 갑자기 쏟아지는 계엄군의 사격을 피하기 위해 급회전하거나 가속페달을 밟다가 차량이 전복되었고,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효천역

효천역 부근에서 교전이 벌어져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광주 시내 백운동에 집결해 있던 시민군들이 시신을 가져오기 위해 효천역으로 향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봉쇄 사실을 미처 모르고 봉쇄지점들을 통과하려다 많은 희생을 당했다. 계엄 당국은 경고방송이나 계도활동 등을 통해 도로봉쇄 사실을 시민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봉쇄지역 주위의 마을 사람들도 계엄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광주교도소

광주 교도소는 18일부터 31사단 96연대 제2대대가 지키고 있다가 21일 오후 530분 전남대에서 철수한 3공수여단으로 교체됐다.

3공수여단은 교도소 도착 즉시 담양, 곡성 방면으로 가는 고속도로와 국도 입구를 차단하고 시위 차량은 물론,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 차량에까지 총격을 가했다.

군 당국은 시민군의 교도소 공격으로 수감되어 있는 죄수가 풀려나는 상황을 우려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근처에서 피해를 입은 시민들 가운데 누구한테서도 교도소 공격을 목표로 했다는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계엄 당국은 5 18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기 위해 광주교도소 습격기도 사건을 조작하였다.

 

주남마을

7,11공수여단은 지원동 주남마을 뒷산에 주둔하면서 22일부터 본격적으로 광주-화순 간 도로를 봉쇄하였다.

7공수여단은 화순에서 광주로 넘어오던 2.5톤 트럭 1대를 너릿재 터널에서 총을 쏴 정차시킨 후 터널로 밀어 넣고 불태워버렸다. 터널이 막히자 이때부터 화순과 광주 사이의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게 됐다.

미니버스 탑승자 18명 가운데 유일하게 홍금숙 한명만 살아남은 소위 주남마을 앞 도로 미니버스 총격사건이다.

11명이 탑승하여 전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민군순찰대 103번 승합차 총격사건이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공수부대가 주남마을에서 빠져나간 뒤 25일과 28일 각각 수습됐다.

홍금숙은 1980년 전남합동수사단의 수사를 받고 조서를 작성했는데, 공교롭게도 다른 사람들의 조서는 대부분 남아 있지만 홍금숙의 조서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군 당국의 문서 조작이 치밀하게 진행됐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국군통합병원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오후 5시까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장갑차 3대를 선두에 앞세우고 통합병원 쪽으로 이동하던 중 부근 민가 지역에서 총격을 가하여 여러 사람이 희생됐다. 오후 550분경 계엄군이 광주통합병원을 장악하였다.

총상으로 죽은 사람들은 군인들이 시신을 가지고 가서 모두 백일사격장에 가매장했다.

 

해남 우슬재, 북평리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해남 우슬재와 복평리, 두 군데다 각기 40명과 10명씩 무장병력을 배치했다. 우슬재에서 발포가 시작됐다.

계엄군이 두려워한 것은 폭도라기보다는 집단 발포로 인한 시민살상의 진상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었고, 그로 인한 무장봉기의 전국적인 확산이었다.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사태의 진상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전남 서남부지역을 제외한 타 지역까지 항쟁을 확산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