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7
10. 해방기간 Ⅲ (p.322~352)
5월 24일 토요일 항쟁 7일째
군 장성들 간의 권총 협박
24일 아침 9시 명노근 교수는 전날 약속한 대로 김기석 소장과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교사 부사령관실로 찾아갔다. 전투복 차림의 준장 3~4명이 부사령관실로 들어왔다. 갑자기 대화 도중 언성이 높아지더니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서울서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 장성 한명이 김기석 소장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들고 쏠 것처럼 달려들었다. 김소장도 권총을 들이댔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정권장악’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정치군인들에게 광주시민의 민주화 요구는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유혈진압을 밀어붙이는 그들의 불퇴전의 결의를 명교수 자신의 논으로 직접 확인했다.
지역방위대의 무기 반납 반대
24일이 되어도 학생수습위원회에서는 무기 회수에 관해 죄종 결론이 나지 않았다.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하는 데서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찾자는 측과 군부의 과잉진압에 대한 사과, 명예회복, 보복 금지를 사전에 보장받자는 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수습위원 중에 비폭력투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무기 회수를 주장하였다. 계엄군에 항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간디처럼 ‘비폭력투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수습위원 조비오 신부, 장세균 목사, 이종기 변호사, 남재희 신부는 23일부터 24일까지 시민군들이 지역방위를 맡은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며 적극적으로 무기 회수에 나섰다. 수습위원일지라도 무기 회수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25일 수습위원들은 그때까지 무기 회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을 집중적으로 돌아다녔다.
“우리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무기 반납은 절대로 못한다. 수습이 되면 우리는 끌려가 죽는다.”라면 완강하게 거부 했다. 조비오 신부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며 통사정하며 애원했다.
25일까지 회수된 총기는 약 4500여정이었다. 전체 5천여정 가운데 90퍼센트 정도가 회수된 것이다. 나머지 5백정 정도는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겠다는 항쟁파와 그에 동조하는 일부 시민군들의 손에 있었다. 무기회수는 이렇게 끝났다.
양날의 칼, ‘무기 반납’
‘무기 회수’는 광주시민에게 ‘양날의 칼’이 되었다. 무작정 총기를 회수하여 반납하는 것을 대부분의 시민들은 원하지 않았다. 무기를 ‘회수’하는 것과 회수된 무기를 계엄군에게 ‘반납’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계엄군은 ‘무조건적인 반납’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반납 후 신분 보장과 평화적 해결을 원한 광주시민 입장에서 볼 때 무기 반납 협상은 아직 본격적인 논의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태였다.
비폭력투쟁의 전제조건은 투쟁의 주체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야만성을 공개적으로 알릴 수 있어야 하고, 야만성이 폭로됐을 때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제3의 ‘심판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광주 상황은 달랐다.
군부는 관객석을 봉쇄하고, 광주에만 제한된 ‘폭력극장’을 만들었으며, ‘관객이 없는 이상 비폭력은 아무런 전술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군부의 언론통제는 광주시민이 타지역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비폭력투쟁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다.’ 계엄군 봉쇄작전에 맞서 최전방에서 대치하고 있던 외곽지역 방위대의 무기 반납은 ‘시민군 스스로의 무장해제’를 의미했다.
계엄사는 이날 아침 8시에 재개된 KBS 라디오방송을 통해 “총기를 소지한 사람은 24일 오전까지 국군통합병원이나 경찰서에 무기를 반납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발표해‘했다. 광주 시내에 다시 살육의 회오리가 몰아칠 조짐이었다.
송암동 군 오인전투
5월 24일 새벽 1시 30분 주남마을에 주둔해 있던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주둔지를 20사단 61연대에 인계하고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여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후 1시 30분경 11공수여단 선두가 광주ㅡ목포 간 도로에 인접한 효덕초등학교 삼거리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트럭을 타고 그곳에 와 있던 무장시위대 10여명을 발견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5백여 미터 정도 뒤따라가던 11공수여단 병력은 그 총소리를 듣고 주변을 향해 무조건 총격을 퍼부었다.
보복과 학살
11공수대원은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오는 줄 몰랐기 때문에 근처 마을 민가에까지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가했다.
11공수대원은 근처 마을로 뛰어 들어가 주민들을 상대로 보복을 시작했다. 공수대원들은 군화를 신은 채 민가에 들어가 그 마을 청년 3명을 끌어내 철길 부근에서 즉결 처형했다.
군인끼리의 오인전투에 대한 급보를 받고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상무대에서 헬기를 타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처참한 현장을 목격한 그는 부하가 죽고 다친 데만 신경을 쓰고 그들이 주민들을 살해한 행위에는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군부대 간 오인전투는 또 있었다. 송암동 오인전투와 같은 날짜인 24일 오전 9시 55분경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 31명(2명/29명)이 영광으로 복귀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통해 이동하던 중 발생했다.
오인전투로 인한 군인 사망 사건은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계엄군 ‘지휘체계 이원화’의 증거로 꼽혀 논란이 되었다.
표류하는 수습위원회
학생수습위원회가 계엄 당국에 제시할 네가지 요구사항이 채택.
첫째, 광주사태에 대하여 정부는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피해 보상을 전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이 결의사항은 오후 3시경 학생수습위원회 명의로 계엄 당국에 제시할 것을 결의하고 김종배 부위원장이 발표했다.
‘무기 반납’을 둘러싼 김창길과 김종배 사이의 의견 차이는 ‘투항’과 ‘투쟁’이라는 본질적인 차이였다. 수습위원회가 어떤 요구를 하건 계엄사령부 입장은 ‘총기를 모두 반납하고 즉시 해산하라!’는 데서 변함이 없었다.
시민들의 선택은 ‘백기 투항’을 하든지, 아니면 ‘결사항전’을 하는 길밖에 없었다.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도청 앞 광장 주변의 담벼락에는 수습위원회의 투항주의적인 자세를 비난하는 문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국내 기자들에게는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는 대신 외신 기자들에게는 관대했다.
국내 기자의 도청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지만 외신 기자들에게는 도청 출입이 자유로웠다.
분수대 주변에서는 주최측이 스피커와 마이크 설치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지만 도청 수습위원회는 도와주지 않았고 오히려 궐기대회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궐기대회를 통해 시민들이 비통함과 억울한 감정을 표출하면서 저항의 공동체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자, 궐기대회를 무산시키려는 계엄군측의 방해공작도 나타났다.
독일 공영방송(NDR)의 힌츠페터와 미국 NBC 방송기자가 궐기대회 장면을 비디오로 끝까지 촬영했다. 오후 6시경 가두행진을 마지막으로 궐기대회가 모두 끝났다.
외곽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던 시민군 중 상당수는 비가 내리자 방어지역을 떠났다.
항쟁지도부의 싹
제2차 궐기대회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성황을 이뤘다.
2차 궐기대회 평가회의에서 네가지 행동지침이 설정되었다.
첫째, 민주인사들에게 연락하여 항쟁과정에 적극 참여시킨다.
둘째, 시민들이 궐기대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 홍보한다
셋째, 도청 내 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주의적 노선을 투쟁노선으로 바꿔나간다.
넷째, 『투사회보』 차량 방송과 궐기대회를 통해 투쟁에 동참할
청년 ․ 학생들을 모아 도청에 파견한 다음 시민군으로 재편성한다.
당면 문제들도 토의했다.
첫째, 정부, 국민, 국군, 서울시민, 언론, 광주 시민등 각계각층에 보내는 글을 작성하여 궐기대회에서 낭독하고, 전국적인 연대를 호소하기도 했다.
둘째, 적십자사를 통해 전국적으로 헌혈운동을 벌여 광주의 유혈사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리고,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처리 문제, 식량 공급과 생필품 보급 등도 적십자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셋째, 청년 ․ 학생들을 조직하여 도청에 들여보내 지도부를 새롭게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무기 반납’을 둘러싼 격론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다. 무기 반납을 둘러싸고 찬반 양측이 더욱 팽팽하게 맞섰다.
왜 싸워야 하는가?
항쟁지도부를 준비하던 청년들은 투쟁노선을 새롭게 정하기 위해 논쟁을 벌였다
승리를 확신하고 싶은가. 만약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가 합심해서 투쟁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첫째, 전세계의 여론이 모두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다.
둘째, 현재 최규하 과도정권은 진퇴양난이다.
셋째, 군부정권이 들어서면 외국에서도 우리와의 경제적 관계를 단절해버릴 것이다.
넷째, 만약에 현 상태에서 계엄군을 묶어두고 우리가 앞으로 1주일만 더 버티게 되면 전남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역으로 항쟁이 파급될 것이다.
다섯째, 이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한국 군부를 방치할 수 없을 것이다.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전략에서 사활이 걸려 있는 곳이다.
여섯째, 만일 위의 모든 사항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유리하다.
비밀리에 폭약 뇌관을 제거하다
도청 지하실에 보관된 다량의 폭약은 시민군이나 계엄군 양측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시민군은 이 폭약이 자신들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다. 계엄 당국과의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무기를 회수하던 사람들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도청 무기고 관리팀이 형성되었다.
수많은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무기고의 안전을 위해 수류탄 안전핀만이라도 제거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도청 지하실 무기고 폭약의 뇌관 제거가 도청의 수습위원회 관계자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계엄 당국 책임자와 무기고 담당자들 사이에 합의되었다.
24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3시간 동안 문용동을 포함해서 도청 무기고를 지키던 4명이 다시 상무대로 가서 김기석 장군을 만났다. 이때도 도청 무기고에 있던 폭약 뇌관 2288개를 가져가 전교사에서 보관하도록 넘겨줬다.
국내 언론들의 ‘진실 외면’
24일 계엄 당국은 ‘광주’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서울의 각 언론사 사회부장들을 군 비행기에 태워 광주로 데려왔다.
정부가 광주 상황에 대해 언론에 최초로 언급한 것은 20일 오전 10시 치안본부의 발표였다. 그 이튿날 오전 계엄사가 석간부터 보도금지를 해제하면서 ‘광주폭동이 통제를 벗어났다’고 공식 보도 자료를 냈다.
광주에서 15만여명이 무기와 탄약, 장갑차 등을 탈취해서 계엄군을 공격했고, 그 결과 ‘군인과 경찰 5명, 시민 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21일부터 광주 소식을 보도하기 시작한 중앙 신문들은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묘사했다. ‘유언비어와 지역감정이 사태를 악화’시켰고, ‘공공건물과 차량이 파손됐다.’고 강조하면서, 계엄군이 오히려 피해자인 양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25일자 사설에서 ‘남파간첩들이 지역감정을 촉발시키는 등 갖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면서 계엄 당국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푸른 눈의 목격자
국내언론의 침묵과 왜곡 속에서 광주의 진실을 전세계에 알린 건 ‘외신 기자들’이었다. 광주의 참상이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유럽, 미국, 일본 등에 알려지자 군부에 비판적인 전세계인들의 여론이 쏟아졌다.
독일 공영방송(NDR) 아시아특파원 힌츠페터가 ‘계엄령 하의 광주에서 시민과 계엄군 충돌’이라는 짤막한 뉴스를 일본 토오교오에서 접한 시각은 5월 19일 오전이었다.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 20일 오전 광주에 도착했다.
20일 항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삼엄한 봉쇄망을 뚫고 들어온 외신 기자 힌츠페터를 뜨겁게 환영했다.
가슴이 꽉 막히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가끔씩 촬영하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21일 집단 발포 현장의 총성도 담았다. 그는 필름을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본사에 보내기 위해 21일 오후 광주에서 서울을 경유하여 비행기로 일본 토오꾜오까지 직접 가지고 갔다. 검문을 뚫고 가는 데 무려 22시간이나 걸렸다. 토오꼬오 공항에서 필름만 넘겨주고 곧장 광주로 되돌아왔다. 23일부터 그는 해방 공간의 시민군 활동과 궐기대회 등 여러 장면을 찍었다. 항쟁 이후 흔히 접할 수 있던 광주항쟁의 현장 동영상 장면은 대부분 이때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들이다.
21일 새벽 5시 프랑스 『르몽드』지 기자 필리쁘뽕스와 『뉴욕타임즈』서울 주재 기자 심재훈은 렌터카를 타고 서울을 출발, 오전 9시 무렵 서광주톨게이트에 들어섰다.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는 ‘폭동’이 일어난 곳이 아니라 여자, 노약자, 어린이 가리지 않고 김밥과 과일 등 음식물을 차에다 올려주는 ‘봉기의 도시’였다.
21일 해질 무렵 ‘AP통신’ 테리 앤더슨 기자는 『타임』지 로빈 모이어 사진기자와 함께 광주 외곽 10길로미터 지점에 도착했다. 피난민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걸어서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 테리 앤더슨은 한눈에 “광주사태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라고 확신했다.
AP통신 쌤 제임슨 기자는 21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서울에서 미국 기자들에게 광주 상황을 처음 브리핑한 장면을 취재했다. 글라이스틴은 “광주 시위가 ‘완전한 폭동’으로 돌변했으며, 전두환의 계엄령 확대 결정이 ‘크게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질서회복을 위해 한국군의 군대 사용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노먼 소프 기자도 21일 광주에 들어와 병원을 돌아다니며 사망자 숫자를 하나하나 세면서 사진을 찍었다. 정부는 그때까지도 시민들이 단 한명도 죽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가 직접 확인한 사망자 숫자만 해도 수십명이었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민을 보호하는 일인데 자국민을 이렇게 죽이는 것은 학살이고, 거짓말하는 정부는 더욱 부도덕하다”고 생각했다.
게브하르트 힐셔는 “광주항쟁을 북한으로부터 남파된 간첩, 또는 소위 용공분자들의 소행으로 돌리려고 하는 군부의 시도는 사실의 왜곡일 뿐만 아니라, 정치를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법과 질서만 유지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협한 사고방식과 모종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고 썼다.
외신 기자들은 항쟁의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계엄군, 광주시민, 외신 기자 = 항쟁을 구성하는 3개 주체였음.
외신 기자들의 노력과 기록이 없었다면, 광주시민의 억울한 희생과 장렬한 투쟁은 ‘존재하지조차 않은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광주항쟁은 말 그대로 ‘북한의 사주를 받은 용공분자들의 폭동’으로 기억되고 있을지 모른다.
11. 해방기간 Ⅳ (p.353~372)
5월 25일 일요일 항쟁 8일째
독침사건
25일 아침 8시 자칭 정보반 반장 장계범이 도청 농림국장실로 쓰러지듯 허겁지겁 들어오면서 어깨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독침을 맞았다!”
담당 의사는 ‘독침에 맞은 것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마비현상을 일으키는 약물’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텔레비전에서는 전남도청 안에서 ‘독침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크게 보도했다. 그뒤 도청 내부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졌다.
장계범은 보안대 합동수사반의 조사에서 “자신이 독침에 찔린 것이 아니라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23일부터 도청에 들어가 자신의 주도 아래 ‘정보부’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25일 아침 도청에서 “독침 비슷한 것을 줍게 됐고, 그곳에서 도피하기 위해 연극을 했다”고 진술했다.
시민들의 긍지
해방기간 나흘째로 접어든 25일, 시내는 질서를 회복해가고 있었다.
항쟁이 끝난 후 계엄 당국의 수사기관은 그동안 시민들이 김밥, 빵, 음료수 등을 시민군에게 자발적으로 제공했음에도 이를 ‘폭도들이 강제로 탈취’했다고 조작했다.
YWCA, 청년 ․ 학생투쟁본부
YWCA는 해방기간 동안 청년 ․ 학생들의 투쟁본부였다. 항쟁 초기 재야인사와 청년 ․ 학생들의 투쟁본부 역할을 하던 녹두서점에 22일 이후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지자 사삼들이 넓은 공간을 찾아 이동한 것이다. 대자보와 현수막을 작성하고 궐기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넓은 장소를 찾다가 도청과 가까운 YWCA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5일 오전 10시 YWCA에서 현 사태에 대한 민주인사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재야 민주인사들은 도청 내 수습위원으로 참여하거나, 또는 상황을 지켜보며 관망하고 있었다.
도청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채택 결의한 7개 항을 근거로 시민들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먼저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적인 재야 민주인사들이라고 하지만 무기 반납을 중지하고 투쟁 조직을 만들자는 정상용, 윤상원의 제안에 동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YWCA에서 회의가 끝난 후 재야인사 일부는 오후 2시 도청 뒤 남동성당에서 다시 모였다.
남동성당에 모인 재야인사들은 도청 수습대책위원회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재차 확인하고, 어떻게 이에 대처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인적 구성이 바뀌면서 수습노선도 바뀌었다. 재야인사들이 합류한 새 수습대책위원회는 도청 부지사실에서 곧바로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성용 신부가 사태수습을 위해 제안한 네가지 사항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최규하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첫째, 이번 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할 것,
둘째, 사과하고 용서를 청할 것,
셋째, 모든 피해는 정부가 보상할 것,
넷째, 어떠한 보복조치도 없을 것 등이었다.
의기 투합
학생수습위원회는 위원장 김창길 등에 의해 거의 일방적으로 무기 회수를 결정했다. 회수된 무기를 반납하는 방법은 시민군으로부터 총기를 회수하여 도청 안에다 집결시켜놓은 다음, 전부 도청에서 빠져 나가버리자는 것이었다.
시민군을 재정비하여 계엄 당국에 대한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윤상원은 박남선에게 현재의 정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빠른 시일 안에 시민군을 재조직하여 방어태세를 완벽하게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상원은 학생수습위원회의 투항주의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지도부를 대학생과 운동권 청년들로 교체할 계획이니 협조해달라고 박남선에게 부탁했다.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제3차 궐기대회가 열렸다. 참가한 시민들의 숫자가 5만여명으로 줄었다. 그렇지만 열기는 오히려 더 뜨거웠다.
궐기대회 도중 외곽에서 온 주민들은 대학생들이 변두리 지역에 각 동별로 한두명씩이라도 파견되어 자신들의 민원을 처리해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항쟁지도부의 탄생
새롭게 집행부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장 무기 반납을 중단하고 협상력을 강화시키자는 방침에 합의했다.
이때 현장 상황을 지켜본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다. “그날 밤 최후 담판을 짓는데, 항쟁파는 이양현, 허규정, 죽은 윤상원 등이고, 윤상원이 똑똑 하기도 하고, 최후협상을 하면서 이쪽은 투항파하고 저쪽은 항쟁파하고 휴전협상 하듯이 했어요.” 김창길은 “무기를 놓고 당장 도청을 떠나버리자”고 주장했고, 윤상운은 “여기서 죽었으면 죽었지 총을 못 놓는다. 지금까지 죽은 동지들과 인명피해 대가를 부장받지 못했다. 수습 후에도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까 총을 못 놓겠다.”고 말했다.
청년 ․ 학생 시민군
25일 날이 밝자 도청에 투입할 대학생을 모으기 위한 홍보활동이 시작 되었다. 대학생들을 모아 시민군으로 재편성하기 위해서였다.
무장시민군들이 대부분 노동자와 서비스 업종의 종업원, 고등학생, 재수생 등이었는데, 대학생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신뢰가 커서 빠른 시간 안에 조직을 정비할 수가 있었다.
항쟁지도부는 교착 상황의 장기화에 대비할 필요가 절실했다.
YWCA에 모인 학생들은 도청으로 들어가기 전 조별로 편성되어 약식교육을 받았다. 총기사용법과 분해법, 전투 중에 필요한 기본적인 사항 등이었다.
민주투쟁위원회 출범
25일 밤 10시 최후까지 싸우려는 항쟁지도부가 결성되었다. ‘학생수습위원회’가 아니라 ‘민주투쟁위원회’로 하였다.
지도부의 활동계획
항쟁지도부는 투쟁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밤샘 회의를 진행했다.
시민 합동장례식은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자꾸 늦어졌다. 계엄 당국에서는 반드시 관계기관에서 참여하여 ‘검시’를 한 후 장례가 치러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항쟁지도부는 이미 계엄군이 24일 밤부터 25일 오전까지 무기고에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뇌관을 모두 제거해버린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새 지도부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하는 방안들도 검토했다.
광주 ‘소탕’ 작전 확정
항쟁지도부가 전열을 가다듬던 그날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 즉 광주소탕 작전도 확정되었다. 25일 육군회관에서 열린 오찬 회의에서 전두환 ․ 노태우 ․ 주영복 ․ 황영시 등 계엄군 지휘부는 육군본부에서 마련한 ‘상무충정작전’ 지침을 검토한 뒤 작전 개시를 ‘5월 27일 0시 1분 이후’에 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상무충정작전은 도청에서 항쟁파 지도부가 등장한 것과 전혀 무관하게 계엄 당국의 자체 계획에 따라 집행된 것이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도청 ․ 전일빌딩 ․ 광주공원 등 주요 목표지점에 침투시킬 공수여단의 특공조를 직접 선정해서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통보해줬다.
대통령의 광주 방문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대통령을 앞세워 광주소탕 작전을 합리화하기 위한 모양새 갖추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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