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읽은책 발췌 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9

물빛향기 2020. 4. 18. 21:40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9

 

3 부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13. 항쟁의 완성 (p.402~452)

    527일 화요일

 

결전의 준비

이슬비가 어둠을 적셨다. 도청, 분수대 광장, 금남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지난 5일 동안 그 공간을 가득 메웠던 해방의 열기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시민들은 문단속을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불을 껐다 인적이 끊긴 시내와 주택가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도청, YMCA, YWCA만 불이 켜져 있고 기동타격대와 시민군 차량이 텅 빈 거리를 가끔씩 질주할 뿐이었다. 오늘밤 광주의 운명이 결정될 판이었다.

26일 초저녁 보안대의 고위급 인사가 윤석류 기동타격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정까지 무조건 도청을 비우고 나가라고 말했다. 만약 그때까지 나가지 않으면 군인들이 강제 진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석루는 공수부대가 들어오면 TNT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밤이 깊어가는데 이종기 변호사가 도청에 나타났다. 이변호사는 내가 수습위원장을 맡았는데 수습을 못했으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2층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목욕까지 하고 나왔다고 했다. 그들을 지탱해준 유일한 힘은 시민들의 자기희생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 그리고 자신들의 정당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었다.

이 싸움은 집단적인 것이었으나 죽음은 개인적으로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신념 없는 선택은 죽음을 가치 없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했다.

 

도청을 사수하자!

26일 오후 궐기대회가 끝난 후 끝까지 도청을 지키자는 투쟁 대열에 2백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자원했다. 마지막 싸움에 참여하겠다는 결사대였다. 항쟁지도부는 YWCA가 비좁았기 때문에 가까이에 있는 YMCA 강당으로 이들을 모이게 하였다.

학생 여러분들의 충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목격한 이 장면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싸우다 죽었는지 역사의 증인이 돼주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앞둔 선택이라 누구에게도 그곳에 남아 있으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출동 전야

26일 오전 1030분 전교사령관실에서는 상무충정작전을 일선에서 직접 수행할 진압작전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육군본부는 충정작전 지침을 만들어 사전에 내려 보냈다. 계엄군의 광주재진입 작전은 5개 방향에서 접근하여 최종 목표인 전남도청을 점령하고, 도청을 비롯한 공원, 관광호텔, 전일빌딩 등 4개 주요 지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26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약 2시간 동안, 출동 명령을 받은 각 부대는 격리지역 활동을 위해, 집결해 있던 광주 비행장 내의 각기 다른 격납고로 이동했다. 광주 시내 지도, 목표지점과 건물의 구조 도면을 펼쳐놓고 침투 목표지점까지의 진입로와 공격할 때 부닥칠 상황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오후 4시경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광주비행장을 방문. 공수여단장들에게 작전 개시 시각을 2701, 즉 자정이라고 알렸다 정보가 사전에 누설될까봐 직접 작전부대를 방문한 것이다.

특공대원들에게는 개인당 M16소총 1정과 실탄 140발씩을 지급했고, 중대마다 수류탄 각 3, 가스탄 2, 방독면 2개씩을 지급하였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진압에 필요한 최소장비로 무장하도록 한 것이다. 방탄조끼를 착용했으며, 철모에는 군인들끼리의 오인사격을 방지하고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하얀 띠를 둘렀다.

핵심 장소만 타격한 뒤 날이 밝기 전 은밀히 시내에서 빠져나가겠다는 것이 공수부대의 전략이었다. 진압 이후 공수부대가 투입된 과잉진압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것에 대비하여 정치적 부담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려는 신군부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비상! 비상!

죽음의 냄새가 어둠보다 진하게 도청 광장을 가득 채웠다.

새벽 2시경 도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싸이렌 소리가 밤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시민군은 여성들을 먼저 피신시켰다.

다시한번 결사항쟁을 다짐하자. 오늘만 도청을 사수하면 우리는 승리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도청을 사수하자.”

실탄이 부족하므로 계엄군 쪽에서 발포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먼저 사격하지 말 것, 사격은 상황실장의 통제에 따를 것, 되도록 근접할 때까지 기다릴 것등을 지시하였다.

기동타격대는 대장 윤석루와 부대장 이재호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새벽 2~3시 무렵 계엄군의 진입이 감지되면서 더 이상 외곽 지역 순찰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윤석루는 모든 기동타격대원을 도청으로 불러들였다.

이제 우리 저세상에서 만납시다. 그곳에서도 다시 만나면 함께 민주화운동을 합시다.”

 

마지막 방송

새벽 350분쯤 도청 옥상의 고성능 스피커에서는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박영순)가 흘러나왔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시민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밖으로 달려 나갈 수 없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날 새벽 그 여인의 피맺힌 절규는 광주 사람들의 가슴속에 비수처럼 꽂혔다. 떨리는 가슴은 피멍으로 물들었고, 그 피멍은 문신처럼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도청 뒤쪽에서 기습한 공수특공대

새벽 4시 직전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선발대가 전남도청 후문에 도착하였다. 후문과 좌, 우측 담벼락 등 세 방향에서 동시에 기습 침투하되, 정문은 시민군 방어가 견고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맨 나중에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410분경 시민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정문 쪽만 제외하고 도청을 공수부대가 완전히 에워싸면서 공격 개시 준비가 완료됐다.

계엄군이 30미터 전방까지 왔으나 총을 쏘지 못하고 겁이 나서 경찰국 건물 지하실에 피신해 있다가 다리에 총을 맞고 체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후문 쪽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새벽 4시경 11공수여단 특공대는 관광호텔과 전일빌딩을 향하던 중 도청가까이 도착했다.

총성이 잠시 멈추자 이재춘의 시야에 상무관 방향에서 철모에 하얀띠를 두른 계엄군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어슴푸레 목격됐다.

경찰국 건물 수색을 마친 공수대원들은 3층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 모습이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이 도경 건물과 약 15미터가량 떨어진 외신 기자숙소 대도호텔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동트기 직전, 나는 공수대원들이 조용히 도청 주변을 돌아 사령부가 있던 건물로 돌격하는 것을 보았다. 전형적인 시가전 교본에 따라 그들은 빌딩의 꼭대기로 올라간 다음 한층 한층 내려오며 청소를 시작했다. 군인들은 방마다 스턴수류탄을 던져 넣고 돌입하여 움직이는 것은 무조건 쏘아댔다.”

테리 앤더슨에 따르면 계엄 당국은 분명히 이 여관에 외국인 특파원들이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곳을 향해서도 M16을 쏘아댔다는 것이다.

20사단 광주사태 작전일지에는 이때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 - “담을 넘는 순간 도청 본관의 옥상과 후문에 거치한 구경 미상의 기관총, 도청 각층 및 도청 앞 전일빌딩 옥상, 상무관, 도청 건물 옥상으로부터 무장시위대의 무차별 사격을 받고 병사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후문을 차단하고, 본관 2층을 습격하여 무기고와 탄약고를 확보하였다.”

 

도청 본관

공수부대가 본관을 공격해 들어왔을 때 이종기 변호사와 위원장 김종배, 부위원장 허규정과 정상용, 상황실장 박남선, 총무 정해민, 기획위원 윤강옥, 민원 실장 정해직 등 주요 간부들과 상황실, 조사반에서 활동한 대원들, 그리고 비상이 걸리자 YMCA에서 도청으로 들어온 시민군 지원병들, 그리고 도청 앞 광장 분수대 주위에 있던 김태찬 등 기동타격대원들이 대부분 도청 본관과 옆 건물 민원실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암흑 속에서 우왕좌왕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는지 몰라 총을 어디다 쏠지도 모른 채 그냥 뛰어 다니기만 했다.”

항쟁지도부의 외무부원장 정상용은 도청 본관 2층 기획관리실장 방으로 몸을 숨겼다.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M16 연발음이 궛전을 때렸다. 사무실 바닥에 엎드려 이렇게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니 오리려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차분해졌다.

! 한놈도 놓치지 말고 모두 죽여라. 죽은 놈은 확인 사살하라.“

 

도청 지하 무기고

민원실 지하 무기고를 지키고 있던 문용동, 김영복, 박선재, 양홍범은 비상이 걸리자 새벽 3시경 박남선의 지시에 따라 옙비군 중대장이 YMCA에서 함께 데리고 들어온 49명의 예비군 및 학생들에게 카빈 소총과 실탄 3발이 든 탄창 한 클립씩을 나눠줬다.

위험과 오해를 무릅쓴 채 계엄 당국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뇌관 제거에 앞장서는 등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문용동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문용동을 제외하고 무기고 경계에 참여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도청 현장에서 체포됐다.

 

도청 민원실

윤상원, 김영철, 이양현은 비상이 걸리자 도청 정문 옆 수위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총과 탄환을 지급받은 다음 식당으로 사용되던 북쪽 민원실 2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창틀에 총구를 내밀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양현의 마음은 착잡했다. 죽음을 각오해서인지 공포나 불안감은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극도의 긴장감이 엄습했다. 곁에 있던 윤상원과 김영철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를 건넸다.

총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양현 일행은 윤상원을 그대로 남겨둔 채 곧바로 강당 앞쪽으로 쫓겨 1층 계단 복도 입구로 몸을 피했다. 창문 너머로 도청 정문이 내려다보였다.

이날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은 단 2명만 부상을 당했고 사망자는 1명도 없었다. 이에 반해 도청에서 사망한 시민군은 16명이고, 이들 대부분은 계엄군이 쏜 M16 총탄에 의해 희생당했다.

 

도청 앞 분수대와 상무관

시민군은 도청 건물 내부뿐 아니라 바깥 쪽, 특히 도청 앞 광장 분수대 주위와 상무관 입구, 도청 정면의 담벼락 초소, 그리고 전일빌딩, YWCA, YMCA 등에도 소규모로 배치돼 있었다.

대부분의 시민군은 계엄군을 향해 거의 총을 쏘지 못했다. 카빈과 M16의 위력에도 큰 차이가 있었지만 만약 시민군이 먼저 총을 쏘았다가는 자신의 위치가 노출돼 집중사격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도청 앞 광장에 총탄이 콩 볶듯 쏟아지면서 땅바닥에 탁탁 튀어 일어나는 불꽃이 별처럼 반짝였다.

임영상, 최재남 일행 4명이 도청 담장 초소에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새벽 4시경 30~40미터 전방에서 흰색 띠를 두른 철모가 어스름 속에 드러났다. 10여미터 앞까지 다가온 계엄군은 그때서야 초소에 있는 시민군을 발견했는지 흠칫 걸음을 멈췄다.

 

전일빌딩, YWCA

전일빌딩에는 11공수여단 61대대 4중대의 특공대 37명이 투입됐다. 비상이 걸리자 밤중에 도청에서 무기를 지급받은 다음 전일빌딩으로 들어갔다.

○○ 대위가 전일빌딩에 직접 들어가보니 당초 첩보와 달리 소수 인원만 있는데다 별다른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사격 없이 곧바로 시민군을 생포할 수 있었다. YMCA와 관광호텔도 시민군들이 거의 없어서 계엄군이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전일빌딩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금남로 뒤쪽에 위치한 YWCA24일부터 항쟁홍보팀의 본부와 같은 장소였다.

YWCA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체포됐다. 11공수여단의 YWCA진압작전은 새벽 515분에 시작돼 약 1시간 동안 지속된 뒤 620분에 종료됐다.

 

광주공원

7공수여단이 광주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시민군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광주공원으로 가는 도중 월산동 부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광주비행장에서 군용 트럭을 타고 출발한 7공수여단은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근처에서 하차하여 광주공원까지 걸어서 이동하였다.

월산동에서 7공수여단 소속 소위 1명이 사망하고, 지역대장이 다리에 파편을 맞았으며, 4~5명의 병사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7공수여단 전투상보에는 시민군 1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5427공수여단 특공대는 제20사단 제 61연대 제1대대에 무기 회수, 선무활동 등의 임무를 인계한 후 725분경 최초 집결지인 K-57비행장으로 복귀하였다.

 

계림초등학교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 세군데 주요 목표지점만을 타격하는 침투작전을 수행했다면, 20사단은 외곽으로부터 넓은 지역을 압박하면서 저인망식으로 밀고 들어갔다.

62연대 2대대 6,8중대는 새벽 320분 경찰 안내요원을 앞세우고 교도소를 출발하여 430분경에 계림초등학교 부근에 도착했다. 그때 잠복 중이던 시민군 20여명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시민군이 계림초등학교 앞 육교를 중심으로 두암동 방향을 향해 엎드려 있었다. 이곳에서 막히자 계엄군은 계림동으로 우회하여 시민군의 등 뒤를 공격하였다. 계엄군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데다 우세한 화력 때문에 계엄군과 시민군의 총격전은 불과 10분도 지속되지 않았다.

새벽 520분경 20사단 병력은 도청에서 3공수여단 병력과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시각까지 도청 정문 쪽은 시민군의 저항 때문에 진입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정문을 피해 측방의 담을 넘어서 3공수여단 병력과 연결한 후 도청 내부로 도주한 무장시위대들을 추적하여 전원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저항하던 무장시위대들을 사살하고 아침 630분경 도청을 완전 점령하였다.

 

인간 도살장

27일 새벽 5KBS 방송을 통해 계엄분소장의 담화가 발표되었다.

폭도들은 투항하라. 도청과 광주공원도 군이 장악하였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한다.”

헬기에 장착된 고성능 확성기를 통해 경고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 새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폭도소탕 작전을 벌였다. 폭도들은 진압되었다. 시민들은 위험하니 아직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 작전에서 폭도 2명을 사살하고, 207명을 체포하였다. 폭도들은 진압되었지만 일부 잔당들이 주택가에 침입하려 한다.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지만 거부하면 사살된다.”

스피커에서 왕왕거리며 흘러나오는 선무방송을 제외한다면 총성이 멎은 뒤의 광주 시내는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그들의 총구에서는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다. ‘동족에 대한 살육이 어느새 계엄군의 혁혁한 전공으로 둔갑해 있었다. KBS에서는 공무원들의 직장 복귀를 지시하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광주시민 여러분!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폭도들은 섬멸되었습니다. 경찰과 공무원 여러분들은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직장으로 돌아가십시오! 오전 9시까지 소속 관서로 복귀하십시오.”

그 시각 YWCA 건물 앞에는 체포된 시민군들이 굴비처럼 포승줄에 묶인 채 아직도 엎드려 있었다.

계엄군은 체포된 사람들의 윗옷을 벗기고 러닝셔츠에다 극렬분자’ ‘무기소지자’ ‘차량탑승자등등의 글자를 빨강 매직으로 썼다. 끈으로 조기 엮듯 사람들을 묶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군홧발로 머리를 차고 쓰러진 몸을 짓밟았다. 붙잡혀온 사람들은 온몸이 피로 얼룩졌지만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어둠이 가시자 모습을 드러낸 도청의 모습은 인간 도살장과 흡사했다.

대도호텔에서 밤새워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지켜본 AP통신의 테리 앤더슨과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의 노먼 소프 등 외신 기자들은 날이 밝자 호텔 밖으로 나왔다. 새벽 6시쯤 도청 주변에서는 철모에 흰 띠를 두른 군인들이 전봇대 뒤에 몸을 숨긴 채 긴장된 표정으로 경계하는 중이었고, 도청 주위 건물 옥상에서도 군인들이 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두명의 외신 기자들은 조심스럽게 도청 앞 광장으로 걸어 나갔다. 군인들만 분주하게 움직일 뿐 시민들의 모습은 아직 눈에 띄지 않았다.

대령 한명이 지프를 타고 외신 기자 쪽으로 다가왔다. 테리 앤더슨이 사망자가 몇 명이냐고 물었다.

폭도 둘과 군인 한명이 죽었소.”

테리 앤더슨은 그의 대답이 거짓이었음을 곧바로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730분쯤 외신 기자들에게만 도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됐는데, 그때 테리 앤더슨이 도청 건물 주위를 돌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시신만 17구였다. 노먼 소프는 27일 아침 가장 이른 시각의 도청 내부 풍경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 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26일 진압작전 직전 공수특공대에게 내려진 전교사 명령 상무충정작전 제4공격간 폭도들에 대한 사격은 가급적 하복부에 지향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한국일보조성호기자는 대학생 시민군 박병규의 죽음을 기록했다.

1980527일 상오, …… 무엇이 이 젊은이를 이곳에 와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국방부 장관 주영복은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합참 정보국장 등과 함께 헬기로 도청 앞 광장 한복판에 내렸다.

27일 아침 군인들은 가택수색을 하면서 신원이 불확실하거나 의심스러운 사람은 모두 연행했다. 이날 계엄군은 외곽을 철벽같이 포위, 봉쇄하고 시내 쪽으로 압축 수색한 후 다시 포위망을 넓혀 시내 가로와 주택을 수색하는 방법으로 그물망처럼 샅샅이 훑어, 수백의 청년들을 끌어갔다. 약간이라도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면 늙은 사람도 예외없이 구타를 당하거나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