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10 <본문 발췌 끝>
14. 남겨진 이야기 (p.453~474)
암매장과 시신 발굴
27일 항쟁이 끝나자 도청에 있던 시신들은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항쟁이 끝난 후 계엄 당국은 시신을 병원 영안실로 옮겨 신원을 확인한 후 가족에게 알렸고, 검시 후 장례 절차를 밟았다. 시신의 대부분은 초여름 날씨에 야외에 방치되었거나 땅에 묻혀서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시신은 지문 채취, 옷 속의 소지품, 신체 특징 등으로 식별할 수 있었지만, 식별이 불가능한 경우는 ‘신원미상’으로 처리됐다. 당시 신원 미상으로 처리된 시신 11구가 망월동 묘역에 매장됐다.
항쟁기간을 전후하여 행방불명자로 신고된 사람은 3백여명에 달했지만 엄격한 심사를 거쳐 ‘5 ․ 18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된 경우는 81명에 그친다.
행방불명자 확인은 진압군들의 암매장과 연관이 깊다. 당시 직접 사체를 묻은 군인들의 협조가 없다면 행방불명자는 영영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시신 검시와 사인 조작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시신 수습이 끝나자 검시조서가 작성되었다.
사망자의 사인을 ‘M16 총상자’와 ‘M1 및 카빈 소총 총상자’로 구분했다. 탄환이 사체 내에 남아 있지 않은 경우 실제로 그 차이를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M16과 카빈 소총은 파괴력이 다르기 때문에 상처의 크기나 형태를 눈으로 보고 사인을 구분했다.
‘난동자’ 혹은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당시 검안에 참여한 의사 2명과 목사는 최대한 ‘양민’ 혹은 ‘비폭도’를 늘리려고 노력했다. 보안사는 M16 총탄에 사망한 경우 군에 저항한 것으로 간주해 ‘폭도’로 분류한다는 방침이었다.
사인이 M16 총상으로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카빈 소총 혹은 M1 총사자나 기타 총사자로 분류했다. 그리고 ‘카빈’ 등에 의한 총사자 94명은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과정에서 서로 총을 쏘아 죽었다’고 짜 맞춘 것이다.
군인 2만명 광주에 투입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계엄 당국은 광주에 약 2만명가량의 정예 군인을 진압군으로 투입했다.
5 ․ 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사망한 계엄군은 총 23명이다. 이들 가운데 광주시민의 총격이나 공격행위로 인한 사망자는 8명(차량사고 3명, 22일 2명, 23일 1명, 27일 2명)이고, 나머지 15명은 군부대 간의 오인전투 14명, 오발사고 1명이다.
항쟁기간 동안 계엄군 간의 오인전투는 3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군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상무대 영창
도청이 계엄군에게 함락되면서 항쟁이 끝난 게 아니었다. 계엄군에게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체포된 순간부터 참혹한 고통이 시작됐다. 진압군들은 땅바닥에 엎드린 연행자들 등 위를 군홧발로 쿵쿵 짓이기며 걸어 다녔다. 도청 2~3층에서 손을 뒤로 묶은 상태에서 연행자들에게 계단을 올챙이 포복으로 기어 내려가게 했다.
27일 아침 도청, YWCA, 전일빌딩, 광주고 등 접전지역에서 생포된 시민군들은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끌려갔다. 이동 중에 고개를 들면 계엄군이 진압봉으로 마구 때렸기 때문에 어디로 끌려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상무대 영창은 반원형의 커다란 공간을 부채모양으로 6개로 나눠 배치했는데 비좁은 앞쪽만 철창으로 터져 있었다. 중앙에 있는 헌병이 영창 내부에 수감된 사람들을 한꺼번에 감시할 수 있는 구조였다.
‘독침사건’을 일으킨 뒤 종적을 감췄던 장계범이 나타났다. 선글라스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지만 김준봉, 윤석루 등은 그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장계범이 김종배, 박남선, 정상용, 윤강옥, 윤석루, 정해직, 김준봉 등 투쟁위원회 간부들을 손가락으로 지적해서 골라냈다. 이들은 16절지 크기의 종이에다 도청에서의 직책을 적은 다음 가슴에 붙이고 사진을 찍은 후 차에 실려 곧바로 보안대로 향했다.
‘민주투쟁위원회’ 간부들이 보안대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씨름선수 같이 덩치가 큰 군인들이 서 있다가 그들의 등을 다독이면서 “오! 전남 공화국 동지여, 환영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사무실 한가운데 둥그렇게 서서 한사람씩 불러내더니 뺨을 번개같이 때린 다음 명치를 한 대씩 갈기고, 푹 꼬꾸라지면 일으켜 세워 다시 때리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였다. 일명 ‘번개 딱, 돌림 빵’ 기합이었다. 4박 5일 정도를 그렇게 맞았다.
몰아치는 검거 선풍
5월 17일부터 7월말까지 5월항쟁과 관련하여 2699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한 27일자에만 590명이 붙잡혔고, 그후 5월말까지 1백여명이 더 체포되었다. 5월 31일에는 항쟁기간 중 연행된 숫자까지 모두 1039명이 조사를 받고 있었다.
계엄사는 항쟁기간 중에 총을 들고 다닌 사람. 수습위원, 대학 학생회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27일 전남도청 진입과 동시에 광주 외곽을 차단하고 시외로 빠져나가려는 관련자를 색출하였다.
고문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은 ‘무장폭도의 수괴’로 분류돼 벽과 천장에 아무 장식도 없이 흰 페인트가 칠해진 보안대 지하실 독방에 갇혔다. 속옷까지 모두 발가벗겨진 채 밤낮없이 3일간 몽둥이로 매타작을 당했다. 머리와 어깨는 물론 온몸을 도리깨질 당하듯이 매질을 당해 어금니와 앞이빨이 부러지고 여러차례 혼절했다. 보안대 수사요원들은 5센티미터 정도의 바늘처럼 가는 송곳으로 손톱 밑을 찔러대는 고문을 하면서 ‘북한에서 온 간첩임을 자백하라’고 협박했다.
28일 새벽 4시 김영철은 영창 뒤 구석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자살을 시도했다. 날카로운 물체로 왼손 동맥을 끊은 후 모서리 콘크리트 벽에다 여러차례 이마를 부딪쳤다.
기동타격대 나일성은 구타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려고 영창에서 두통제, 해열제, 지사제를 모았다. 약은 일주일에 한번씩 군의관이 왔을 때만 받을 수 있었다.
‘무장폭동’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인권’이란 단어는 아예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온갖 기상천외한 고문들이 자행됐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만도 큰 시혜를 받는 것처럼 여기라는 분위기였다.
간첩 ‘모란꽃’
전옥주와 차명숙은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시위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가두방송으로 시위대를 이끈 인물인데, 22일 오후 4시경 광주 화정동 부근의 시위대 속에서 갑자기 ‘간첩’이라고 몰아붙인 자들에게 붙잡혀 보안대로 끌려갔다. 전옥주는 자신을 체포한 사람이 스포츠머리에 곤색 잠바를 입은 30대 청년으로 일반 시민이 아니라 정보기관의 요원처럼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보안대로 들어서자 50여명의 남자들이 ‘간첩이 왔다!’며 모두 그녀를 쳐다봤다. 전옥주와 차명숙은 따로 분리되어 조사를 받았다. 여자로서 견디기 어려운 온갖 치욕스러운 고문을 당했다. 수사관들은 총부리를 겨눈 채 수차례 자술서를 강요하며 그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기자들을 모아놓고 간첩이라며 사진까지 찍도록 했다. 전옥주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간첩이 아니라고 호소하자 소총 개머리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찍었다. 보안대에서는 전옥주가 북한 모란봉에서 2년 동안 간첩교육을 받고 넘어왔으며 가명이 ‘모란꽃’이라 발표했다. 언론에서는 “시위 군중들이 지난 22일 붙잡아 군에 인계한 전옥주 여인 등 3명이 모두 고정간첩으로 판명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전옥주는 부친이 경찰 출신으로 신원이 확실했다. 결국 간첩으로 몰지 못하고 MBC 방송국 방화범으로 몰았다가 이도 역시 여의치 않자, 나중에는 김대중사건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했다.
차명숙은 전남대 학생으로 행세하다가 6월 초순경 수사과정에서 거짓 신분임이 들통났다. 그녀의 학생증 주소지로 수사관이 찾아갔는데 학생증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시위 도중에 주운 학생증으로 여대생 행세를 한 것이다. 차명숙의 신분이 거짓으로 판명되자 수사관들은 ‘진짜 간첩을 잡았다’며 쾌재를 불렀다. 차명숙은 다시 고문하자 본명과 고향을 밝혔다. 그녀의 고향 담양 창평에 찾아가니 친척들이 있었고, 형편이 어려워 가족 모두 서울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지만 수사관은 그녀에게 언제 북한에 다녀왔냐고 닦달했다. 그녀는 간첩임을 실토하지 않는다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해 9월 19일 계엄당국은 전옥주와 차명숙을 ‘간첩죄’가 아니라 ‘계엄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로 기소했다. 전옥주는 10년, 차멱숙은 장기 10년, 단기 7년 형이 선고됐다. 전옥주는 1981년 4월 3일 석방됐고, 차명숙은 같은 해 12월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연결
합동수사단은 연행자 전체를 하나의 그림 속에 아우르는 수사체계도를 먼저 그렸다. 수괴를 김대중으로 한 후, 광주지역 재야 수괴 홍남순, 대학생 수괴 정동년, 폭도 수괴 김종배, 극렬가담 불량배 박남선과 윤석루 등으로 체계도를 작성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이 ‘그림’에 끼워 맞췄다.
그후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를 앞두고 당시 수사팀의 일원이던 광주 505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은 5 ․ 18수사가 어떻게 조작됐는지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김대중과 범죄사실을 연계시키기 위해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5 ․ 18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요 근거가 되었고 정동년, 홍남순, 조아라, 명노근 등 민주인사들은 상무대 조사실과 보안대 지하실에서 고문을 받으며 그들이 짜놓은 각본대로 조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재판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검거된 사람은 2522명으로, 이 중 훈방이 1906명이며, 616명이 군법에 회부되어 212명은 불기소되고, 404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군사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피고인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권리인 변호사 선임권도 보장되지 않았다.
불법 파행의 재판은 상무대 전투병과교육사령부 군사법정에서 진행되었다.
재판과정에서 정동년이 김대중으로부터 5백만원을 받았다는 그 시각에 당사자가 학원에서 강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후진술에서 정동년은 “이번 광주사태에 길가는 시민들을 붙잡아 정말 수괴가 있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아마도 광주사태에 두목, 즉 수괴가 있었다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정상용은 피고인석에서 뒤로 돌아 방청객을 향하여 한시간가량 최후진술을 했다. “지금은 비록 어둡고 참담한 감옥에 우리의 몸이 갇혀 있으나 자유의 종이 한없이 울리는 민주세상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확신을 갖고 이 어려움을 이겨나갑시다!” 그의 최후진술이 이어지는 동안 방청석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재판관 중 한명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였다. 수사과정의 혹독한 고문으로 몸은 비록 쇠약해졌지만 당당한 모습이었다.
5 ․ 18재판은 대법 선고까지 5개월 동안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법원(1981년 3웡 31일)에서 형이 확정된 후 3일 만인 4월 3일 관련자 83명 전원에 대해 특별감형, 특별사면 또는 복권조치가 취해졌다.
그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특별사면 조치가 내려져 정동년 등 12명이 형 집행정지로 석방됨으로써 광주항쟁 관련자는 모두 풀려났다.
15. 항쟁 이후, 미완의 과제들 (p.475~491)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전남도청 장악으로 항쟁이 끝났다. 12 ․ 12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잡고, 5 ․ 17내란을 일으켜 광주학살을 자행한 뒤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그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항쟁으로 남편과 자식을 잃은 희생자 유가족과 구속자 가족들, 그리고 부상자들은 조직을 결성하고 투쟁을 시작했다.
유족회
5월 29일 상무관에 안치된 희생자 129구의 시신이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 시민묘지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 삼우제 때인 5월 31일 1백여명의 유족이 첫 모임을 갖고 ‘5 ․ 18광주의거 유족회’를 결성하였다. 이듬해부터 조직을 체계화시켜 1980년대 중반에는 명칭을 ‘5 ․ 18광주민중항쟁유족회’로 개칭하였다.
부상자회
부상자 모임은 유족회보다 늦게 결성되었다. 부상자들은 분산되어 서로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서 거동에 제한을 받았다. 항쟁 직후부터 여러차례 모임을 결성하려 하였지만, 당국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1982년 8월 1일 경찰의 단속을 피한 18명의 부상자들이 모여 ‘5 ․ 18부상자동지회’를 발족시키게 되었다.
구속자회
5 ․ 18 당시 구속자 가족들은 수감된 가족들의 뒷바라지는 물론 재판과 관련된 정보 교환 및 대응 등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재판 개시 이전부터 활동을 하다가 군사법정의 1심 공판이 있던 1980년 9월 20일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이 ‘광주사태 구속자 가족회’를 결성하였다. 구속된 남편, 자식들의 재판에 대비하기 위해 상호 소통과 연대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구속자회 활동은 석방운동부터 선고공판투쟁, 혈서탄원서 사건, 전두환 광주방문 저지투쟁, 명당성당 농성 등으로 이어졌다.
5 ․ 18에서 6월항쟁까지
1980년 5월 28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광주사태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5월 29일 고려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살포하다 체포되었다. 5월 30일에는 서강대 학생 김의기가 서울 종로 5가의 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항쟁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정부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긴 후 투신 자살했다.
연세대 등에서 유인물 사건이 터졌으며, 한국신학대 등 10여개 대학에 유인물이 뿌려지고 일부 대학에서는 교내시위가 일어났다.
1981년 전두환정권은 대학 캠퍼스에 수많은 사복형사들을 투입하고 대학본부에 학사지도관을 두어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통제했다.
1983년 5월 학생들의 저항은 더욱 대규모화되고 거세졌다.
1983년 12월 21일 정부는 대학생들의 치열한 저항 투쟁 때문에 학도호국단을 해체하였다. 또한 시국사건으로 제적된 학생들의 복교조치와 구속자 172명 석방, 142명의 복권조치를 단행하였다.
1984년 대학가에서 저항의 물결은 더욱 거세게 일었다. 전국 55개 대학에서 학원자율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고, 그 불길은 재야와 정치권으로 확산되었다.
드디어 1984년 5월 망월묘역에서 경찰봉쇄가 사라졌다. 5 ․ 18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참배객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했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지역에서 대학생과 민주인사들이 망월동으로 몰려왔다. 망월동은 이때부터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장소로 떠올랐다. 추모집회가 새로운 저항운동으로 발전하면서 5 ․ 18진상 규명의 목소리가 커져가기 시작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에너지로 확산되었다.
국회 광주청문회
1987년 6월 항쟁은 5 ․ 18 진상 규명 문제를 국회에서 제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두환에 이어 집권한 신군부의 노태우 정부는 1988년 1월 16일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5 ․ 18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광주사태 치유방안’을 내놓았지만 진상규명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1988년 4월에 실시된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만들어지자 국회는 헌정사상 최초로 5 ․ 18청문회를 도입하였다.
1988~89년에 진행된 광주청문회는 정치 상황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5 ․ 18항쟁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미흡한 점이 많았다.
학살 책임자 전두환의 국회 증언을 조건으로 여야 정치권은 광주청문회를 마무리하였다.
국민들의 사법투쟁
그러자 1988년 10월 ‘5 ․ 18광주민중항쟁동지회’는 전두환, 노태우 등 군 고위지휘관 9명을 5 ․ 18책임자로 고소하였다. 1992년 검찰은 피고소인들을 소환 조사하지도 않은 채 이 사건을 무혐의로 끝내버렸다.
1992년 12월 김영삼정권이 등장하자 잠시 주춤하던 5 ․ 18 진상 규명 움직임이 다시 본격화됐다. 피해자 단체와 일반 시민사회단체들이 진상조사와 가해자 본격화됐다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앞세워, 1995년 7월 18일 이들 모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쿠데타가 성공하여 새로운 헌정질서가 생겨났기 때문에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리한 것이다.
5 ․ 18특별법 제정
5 ․ 18특별법 쟁취를 위한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1995년 7월 14일 광주에서는 ‘5 ․ 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 ․ 전남공동대책위원회’라는 대책기구를 만들었다.
김영상 대통령은 ‘5 ․ 18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2 ․ 12 및 5 ․ 18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전격 구속되었다.
책임자 처벌
특별법이 제정되자 그동안 사법적 처벌의 울타리 밖에 있던 12 ․ 12쿠데타와 5 ․ 18학살 책임자들이 모조리 기소되었다. 법정에서의 긴 공방을 거쳐 마침내 1997년 4월 18일 대법원에서 이들에 대한 재판이 확정되었다.
대법원은 12 ․ 12쿠데타를 ‘군사반란’으로, 5 ․ 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신군부의 진압을 ‘내란’으로 판정했다.
판결 결과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은 ‘수의를 입은 보통사람들’로 돌아갔다.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만큼 모든 예우를 박탈당했다.
‘재조사가 불가피하다’
철저하지 못한 책임자 처벌은 시간이 흐르면서 ‘5 ․ 18 뒤집기’와 왜곡으로 나타나고 있다. 몇몇 극우 선동가들은 ‘1997년 대법원 판결’ 대신 ‘1980년 군사재판’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들은 ‘1980년 5월 27일 소탕작전 때 계엄군은 단 한명의 시민군도 사살하지 않았다’거나 ‘도청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시민군들끼리의 오인사격에 의한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
대법원은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에 대하여 ‘내란죄’가 아닌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하여 단죄했다.
극우 선동가들이 도청소탕 작전 때 ‘계엄군에 의한 사살자는 단 한명도 없다’는 주장을 지속한다면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재조사가 불가피하다. 이를 통해 반인륜적인 살인행위의 구체적인 실상이 제대로 드러날 것이며, 악의적 왜곡선동으로 유족들의 가슴에 쇠못을 박아대는 행위가 더 이상 자행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역사는 기록과 해석으로 교훈이 전승된다. 광주광역시는 1994년 ‘5 ․ 18민주화운동 자료실’을 설치하고 5 ․ 18기록물과 유품 등을 수집하여, 1997년부터 『5 ․ 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를 간행하였다.
2000년 9월 한국기록학회는 5 ․ 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가치가 있다고 발표했다.
2010년 1월 광주광역시에 ‘5 ․ 18기록물 유네스코 세게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2011년 5월 20일 국무총리가 유네스코 주재 한국대사에게 ‘5 ․ 18은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입장을 전달했다. 그해 5월 23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총회에서 이리나 보꼬바 사무총장이 5 ․ 18등재서류에 최종 서명함으로써 등재를 완료했다.
5 ․ 18기록물이 영국의 「대헌장」, 프랑스혁명의「인권선언」 등과 마찬가지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으로써 5 ․ 18은 인류사의 진전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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