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읽은책 발췌 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11

물빛향기 2020. 4. 19. 20:26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11

 

   개정판을 내며

   항쟁 기록의 또다른 역사(p.570~585)

          - 이재의 -

 

    19855월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5 18 광주민중항쟁을 기록한 여러 책자 가운데 최초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고전으로 꼽힌다5 18 기록을 위한 노력은 항쟁의 여진이 아직 채 가시기 전인 1980년 말부터 시작됐다. 초기 자료수집 작업은 정용화와 조봉훈 등에 의해 본격화됐다. 이들은 진실규명을 위해 반드시 자료집을 발간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다.

    정용화는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1978)에 연루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된 전력이 있으며, 또다시 5 18관련 혐의로 구속되어 19801031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자 5 18 자료 수집에 착수하였다. 정용화는 5 18 광주민중항쟁 이전 고 윤한봉이 설립한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연구소장직을 맡아 활동하면서 전남민주청년협의회회장을 겸하고 있었다. 또 현대문화연구소는 그 무렵 김상윤이 운영하던 녹두서점과 더불어 광주지역 청년, 노동, 재야운동 등을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조봉훈은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등 시국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가 198011월 석방 직후 고향 광주로 돌아오자 곧바로 5 18 자료 수집에 착수했다.

 

    198011월부터 19817월초까지 약 7개월간 집중적으로 자료수집이 진행됐다. 이들은 광주 시내 교회의 목사나, 성당의 신부는 물론 신도, 그리고 구속자 가족을 통해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료수집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인 19813월 비상계엄이 해제되면서 4월초 5 18 관련자들 상당수가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들이 참여하면서 그때까지 집한 자료의 정리 작업이 탄력을 받게 됐다.

    김상집은 5 18 기간 동안 녹두서점에서 매일 상황일지를 작성하였고, 스스로 시민군의 일원으로 YWCA 등에서도 활동을 펼쳤다.

 

    소준섭은 수집된 자료와 증언 가운데 너무 과장됐다고 생각되거나 사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들은 정리 대상에서 배제하였다. 확인된 사실만 기록한다는 방침이었다. ‘광주백서초고는 200자 원고지 약 500매 분량이었다. 그 목차는 ‘1.발단(학생시위 : 518), 2. 민중봉기로 발전(시민합세 : 519), 3. 무장봉기로 전환(521), 4. 전남 민중봉기로(시외로 확산 : 521), 5. 시내장악 및 자체 조직과정(522~26), 6. 계엄군 무력 진입(527이며, 그리고 맨 마지막에 부록으로 찢어진 깃폭을 발췌하여 실었다.

    19817월초 자료수집 작업은 뜻밖의 사건이 터지면서 갑작스럽게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1982년초 모임 아들사건의 여진이 가라앉자 소준섭은 서울에서 지인들과 함께 항쟁 기록을 알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자신이 손으로 쓴 광주백서원본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불태워버렸다.

    광주백서유인물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광주항쟁의 진실에 대해 의구심을 느끼거나 각종 유언비어에 의해 왜곡된 인식을 갖기 쉬운 당시의 상황에서 항쟁의 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였기 때문이다.

    집필에 필요한 모든 것은 이재의가 책임지고 수행하기로 하였다. 작업을 진행할 실무팀의 구성과 책의 내용, 집필방향 등도 모두 이재의에게 맡겨졌다.

 

    항쟁 5주년을 맞는 19855월 이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책을 출간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이재의는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이자 고교 동창생이던 조양훈에게 함께 집필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재의와 조양훈은 며칠에 걸쳐 자료를 분류한 다음, 곧바로 취재에 착수하였다. 광주백서는 복사된 여러 유인물 자료 가운데서도 체계적이고 객관적이어서 취재의 출발점이 됐다.

 

    원고가 완성되자 정상용이 나서서 명목상 집필을 책임져줄 사람과 출판사를 물색하였다. 책이 출간되면 집필자는 물론이고 출판사 대표도 모두 구속될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출판은 풀빛출판사가 맡기로 하였다. 풀빛의 나병식 대표는 광주일고 출신으로 서울대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974년 사형선고를 받았던 인물이다.

    황석영은 집필 책임을 맡겠다고 수락했다. 나병식과 황석영이 출판과 집필의 책임을 전적으로 감당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출판과 동시에 들이닥칠 사찰 당국의 탄압에 대비해서 작가가 책임지기 위한 방책이었다. 황작가는 흔쾌하게 동의하고 곧바로 서울 풀빛 출판사 옆 자그마한 여관에서 책이 출판될 때까지 한달반 이상 두문불출하며 원고를 완성하였다.

    제목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문병란 시인의 부활의 노래라는 시에서 따왔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넘어넘어는 완성된 책자 형태로 1985520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이라는 명찰을 달고 세상에 얼굴을 보인 것이다.

    나병식 사장은 구속돼 재판을 받았으며, 황석영 작가는 수사만 받은 뒤 곧바로 풀려났다. 공안 당국은 김지하 시인의 전례를 보아 황석영 작가를 구속, 재판을 하게 되면 광주학살의 진상이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국내에 머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넘어넘어는 초판 출간 이후 국내의 정치상황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다. 국회 광주청문회나 12 12, 5 18 재판 때는 진상을 규명하는 데 유력한 정황증거로 채택되었고,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5 18사건 조사보고서 작성에도 기초자료로 활용됐다.

   1985년 전두환정권의 탄압을 뚫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넘어넘어초판을 썼듯이, 보수정권의 역사 왜곡과거 회귀를 저지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5 18의 진실을 다시 알리기 위해 개정판을 써야 한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됐다. 이에 따라 넘어넘어초판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2014년 개정판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개정판의 집필은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가 맡았다. 이재의는 초판의 초고를 집필하였고, 그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전용호는 5 18 때 윤상원 열사와 함께 투사회보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넘어넘어초판이 피해자인 광주시민의 증언과 기록만을 토대로 집필된 데 반해, 개정판은 그 이후 밝혀진 계엄군의 군사작전내용과 5 18재판 결과를 반영하여 역사적, 법률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5 18을 현장에서 목격한 내외신 기자들의 객관적인 증언도 실었다.

 

    넘어넘어초판 집필에 사용된 자료들은 대부분 전남대학교 ‘5 18연구소에 기증하였다. 이재의가 노트에다 쓴넘어넘어초고 원본은 5 18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보관 중이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넘어넘어가 온전하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많은 이들이 오로지 항쟁의 진상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목표 하나로 매진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