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읽은책 발췌 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8

물빛향기 2020. 4. 18. 21:25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8

 

 

12. 해방기간 Ⅴ (p.373~399)

   526일 월요일 항쟁 9일째

 

죽음의 행진

26일 새벽 4시 무렵 도청이 발칵 뒤집혔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 봉쇄지역 세 군데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밀려들어온다는 급보가 무전기를 타고 들어왔다.

계엄 당국은 도청의 수습위원회에 이런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계엄군은 도청 후문 방향에서 공략할 계획을 세워놓고 마치 정문 방향인 금남로 쪽에서 공격 할 것처럼 기만 책략을 썼다. 계엄군 진입 소식으로 도청 시민군에게는 비상령이 떨어졌다.

김성용 신부가 말했다. “우리들이 총알받이가 됩시다. 탱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갑시다. 광주시민들이 다 죽어가는데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읍시다.” 결연한 분위기에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아침 7시부터 4시간 30분 동안 계엄분소 회의실에서 협상을 진행하였다.

김기석 소장이 말했다. “나는 군인이다. 정치문제는 모른다. 여러분이 무기를 회수하여 군에 반납하면 경찰로 하여금 치안을 회복하도록 하고 싶다. 시간이 없으니 30분 안에 이야기를 끝내자. 오늘 중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시내 질서를 회복하라. 그것을 못한다면 앞으로 나하고 수습대책회의를 할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다.”

수습위원회 대변인 김성용 신부가 이야기했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벌여놓고 대화하자면서 30분 안에 끝내자는 게 말이 되느냐. 방송에다 계속 광주시민들을 폭도라고 하면 되겠나? 왜 폭도라고 하는가? 왜 우리가 폭도냐? 당장 그런 말 쓰지 마라. 광주 시내에 절대로 군인들이 들어오면 안된다. 수습을 하더라도 경찰이 나서서 하라. 어떻게 주인인 우리 백성들이 사준 총칼을 가지고 이렇게 할수 있는가?”

신군부 수뇌부는 이미 527일 새벽 01분 이후 상무충정작전’, 즉 유혈소탕작전을 결정한 상태였고, 26일 아침 이 방침에 따라 전교사에서는 작전회의가 열렸다. 병력이동과 장갑차, 헬기 지원 등 구체적인 작전 지시가 내려가고 있었다. 이미 진압작전이 시작된 상황에서 협상은 의미가 없었다.

 

김성용 신부는 이날 계엄사와 협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방록을 작성했다. - p.376(비망록 5가지)

 

김성용 신부는 농성동 성당에 들러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화로 협상결과를 알리고 YWCA로 향했다.

27일 새벽 도청은 이미 계엄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복면 쓴 시민군

26일 새벽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한다는 소식에 기동순찰대 양기남, 임성택, 구성회는 군용 지프를 타고 농성동으로 출동했다. 그들은 21일 전투경찰이 도청에서 철수할 때 버리고 간 군복과 방석모, 그리고 25일 도청에서 지급받은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날 외신 기자가 찍은 사진, 짙은 녹색 군복을 입은 채 전투경찰의 방석모를 쓰고, 군용 지프차에 올라 카빈총을 내밀고 있는 2명의 시민군 사진은 5 18을 상징하는 모습의 하나가 되었다. 최근 일부 극우 선동가들은 이 사진의 주인공이 북한 특수군이라고 주장하는데 당사자 임성택은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에 분연히 맞서겠다는 입장이다.

 

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새벽에 계엄군의 시내 진입 소식이 알려지자 항쟁지도부는 당초 오후로 예정된 궐기대회를 앞당겨 오전에 열기로 했다.

언론인들에게 정확한 보도를 요구하고, 군인들에게는 권력을 찬탈하려는 전두환 군부세력의 시녀가 되지 말고, 군 본연의 임무인 국토방위를 위해 휴전선으로 돌아가라는 취지의 글을 낭독했다.

 

7개 항으로 된 80만 민주시민의 결의를 채택.

1)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나라.

2) 무력탄압만 계속하는 명분 없는 계엄령은 즉각 해제하라.

3)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전두환을 공개 처단하라.

4) 구속 중인 민주인사를 즉각 석방하고, 민주인사들로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하라.

5)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왜곡보도 하지 말라.

6)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피해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한다.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우리 80만 시민 일동은 투쟁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선언한다.

이 성명서는 수습에만 초점이 맞춰진 이전 것들과 달리 항쟁의 대의명분을 민주화로 분명히 했다. ‘구국 과도정부 수립민주정부 수립요구가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항쟁의 성격을 과잉진압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군사쿠데타를 거부하는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것이다.

 

오후 2시 도청 내무국장실에서는 항쟁지도부와 광주시장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

광주시장에게 9가지 사항을 요구하였다.

1) 1일 백미 1가마씩 제공 2) 부식 및 연료 제공 3) 40개 제공

4) 구급차 1대 지원 5) 생필품 보급 원활히 6) 치안문제는 경찰이 책임지라

7) 시내버스 운행 8) 사망자 장례는 도민장으로 9) 장례비 지원

 

투쟁위원회는 유족 대표 8명과 함께 부지사실에서 정시채 부지사와 사회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절차를 논의하였다. 시신이 부패하므로 빨리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하자 부지사가 장지를 광주시 망월동 시립공원 묘지로 하고 시민장으로 하겠다고 했다.

장례 날짜를 28일로 정한 것은 계엄군의 진입을 늦춰보자는 판단이었다. 최소한 장례식을 치를 떄까지는 계엄군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여성들의 취사활동

22일부터 주소연 등 여고생과 대학생, 가정주부 들이 도청에 들어와 밥짓는 일을 했다.

22일과 23일은 지역방위대들이 경계하고 있던 학동 백운동 산수동 화정동에도 주먹밥을 만들어 보냈다.

 

가두방송 홍보반

항쟁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가두방송에 참여했다. 진압봉과 대검, 총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스피커가 필요했다. 시위가 한창 고조되던 20일과 21일에는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서 방송장비를 가져와 사용했다.

26일 가두방송을 마치고 도청에 머문 박영순은 27일 새벽 도청 상황실에서 마이크를 잡고 계엄군의 침입 사실을 방송했다.

 

기동타격대

26일 오후 2시 항쟁지도부는 도청 본관 2층 식산국장실에서 기동타격대를 조직하였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는데 그동안 기동순찰대로 활동하던 시민군 대부분이 지원했다.

새 항쟁지도부가 들어서면서 무기 회수에서 결사항전으로 분위기가 밥뀌자 윤석루와 이재호가 나서서 무장시민군을 기동타격대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조직했다.

기동타격대는 각 조당 군용 지프차 한 대와 무전기를 한 대씩 지급하였다. 무기는 성능이 좋은 것들로 골랐고, 수류탄도 지급하였다. 복장도 좀 더 의연하게 보이기 위해 전투경찰이나 군인들이 후퇴할 때 버리고 간 방석모, 철모로 모자를 통일시켰다.

항쟁기간 동안 시민들은 붙잡은 군인들을 대부분 부대로 돌려보냈다.

 

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 대표들의 협상결과가 알려지면서 계엄군 진입이 확실해지는 시점에서 열린 궐기대회였다. 성명서를 낭독하던 종전과는 달리 시민행동강령을 채택하여 발표했다. 많은 시민들이 연단에 돌라가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했다.

궐기대회가 끝날 무렵, 항쟁지도부가 오늘밤 계엄군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외신 기자회견

26일 오후 5시경 외신 기자회견이 윤상원 대변인 주관으로 도청 본관 2층 대변인실에서 열렸다. ‘수습위원회에서 민주투쟁위원회로 바뀐 항쟁지도부가 공식적으로 가진 첫 기자회견이라 큰 관심을 끌었다. 기자출입증 20여매가 외신 기자들에게만 발부되어 세계의 이목이 광주로 집중된 상황이었다. 외신 기자만을 대상으로 한 공식적인 기자회견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피터슨 목사는 이번 사건을 조장한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군인들이라고 말했다. 광주시민의 항쟁을 북한군의 개입혹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몰던 계엄군 지휘부의 주장은 요즘도 5 18 왜곡세력들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마지막 회의

오후 6시 도청 부지사실에서 수습위원회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투항파와 항쟁파의 갈등 속에서 투항파들은 도청을 나갔다.

피터슨 목사는 나중에 데이브 힐에서 한국 공군이 공격의 일환으로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거대한 슬픔

상무관에 들어온 시신은 전남대병원, 적십자병원, 기독병원 등 대형병원에서 옮겨온 경우가 많았다. 시신이 들어오면 먼저 도청 조사과를 거친 다음 본관 옆과 민원실 사이의 공터로 옮겨졌다.

시신은 총상으로 팔, 다리가 잘려 나갔거나 몽둥이 등에 맞아 부어오른 것이 많았다. 가족들이 나타나면 염을 하고, 흰 천으로 관을 두른 뒤 그 위에 태극기를 덮어 상무관으로 옮겼다.

 

계엄군의 분열공작

계엄군이 21일 광주 시내에서 모두 퇴각한 것은 시민들이 나서서 펼친 필사적인 항쟁의 결과였다. 계엄군은 퇴각과 동시에 광주시 일원의 군사적 봉쇄를 실시했다. 그러면서 ‘523일 이후 폭도소탕 작전 의명 실시를 결정했다.

계엄군은 광주소탕 작전의 일환으로 심리전을 전개했다.

 

상무충정작전

523일 전남북계엄분소에서는 전단을 살포했다. “점거당한 광주시의 평온을 되찾고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광주 시내에 진주한다. 선량한 난동자는 불순분자에게 더 이상 속지 말고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 시민은 거리로 나오지 말라. 반항하는 자는 사살한다. 학부형들은 자녀를 단속하라. 작전은 금일 중으로 실시한다.” 원래 23일 진압작전을 펼칠 예정으로 이 전단을 살포했으나 상부에서 지연되었다.

계엄사령부는 광주 소탕작전계획을 여러 차례 변경하였다.

25일 낮 1215분 육군회관에서 전두환, 주영복, 이희성, 황영시, 노태우, 등 계엄 지휘부가 마주 앉았다. 이희성은 이들에게 육본 작전지침을 회의잘료로 돌렸다. - ‘상무충정작전

작전 개시는 ‘527일 새벽 01분 이후로 확정했다. 소탕작전은 전교사령관 책임 아래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