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하 기/읽은책 발췌 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6

물빛향기 2020. 4. 12. 22:45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 6

 

제 2 부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8. 해방기간 Ⅰ (p.272~304)

 

522일 목요일 항쟁 5일째

 

승리와 해방의 감격

항쟁 5일째, 승리와 해방의 감격은 아침 햇살 퍼지듯 온 시내에 퍼져나갔다. 처음으로 만끽하는 해방감이었다. ‘폭도라고 몰아붙이던 자들이 쫓겨 나갔다.

시민들은 생전 처음 보는 공수부대의 야수적인 행위를 목격하면서 처음엔 두려움에 몸서리쳤으나, 점차 분노가 치솟았으며, 급기야 온몸을 던져 싸웠다.

 

핏물 자국 씻어내고

시민들의 항쟁은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표출된 본능적인 자기 방어로부터 시작됐으나, 역사적 파장은 훨씬 깊고 심대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금남로를 치우기 시작했다. 금남로 바닥 여기저기에 굳지 않은 채 선홍빛을 띠고 있는 희생자들의 핏물 자국도 물로 씻어냈다.

 

시민군의 조직화

시민군은 자체 조직과 병력을 정비하여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광주 공원 광장에서는 시민군을 재편성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기동순찰대

계엄군이 반격해올 때 신속하게 대비할 수 있도록 무장 트럭 2020여 대를 도청 앞에 대기시켰다.

첫째, 도청을 지킬 경비반을 조직했다. 도청 건물을 지키고 정문 출입을 통제하면서 시신을 옮기거나 관리하는 일 따위를 담당할 시민군이었다. ‘경기반에게는 무기가 지급되었다.

둘째, ‘기동순찰대를 조직했다. 공원에서 등록을 마친 뒤 경계업무를 부여한 차량 시위대를 도청에서 다시 기동순찰대 조직으로 편성했다. 기동순찰대는 총기를 소지하고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계엄군과 대치하는 지역을 경비하는 임무였다.

 

도청 상황실

도청 상황실 전화로 외곽 지역 방어를 담당한 시민군들과의 연락체계를 확립하였다. 도청 상황실에서도 지역방어의 전반적인 실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상한 사람들

도청 1층 상황실을 비롯한 여러 사무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드나드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드나드는 시민들도 많았지만, 계엄군의 정보원이나 공작원이 끼어들 수 있는 소지도 그만큼 컸다.

 

시민성토대회

군용 헬기가 공중에서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였다. 시민들은 전단을 받아보고 즉시 찢어버리거나 하늘에 떠 있는 헬기를 향해 주먹질하며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정오가 되자 도청 옥상의 국기게양대에 검정색 천으로 만들어진 조기가 게양되었다.

도청 앞 광장에 무료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분수대 위로 올라갔다. 그동안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분수대 주위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습대책위원회의 구성

목사, 신부, 변호사, 관료, 기업인 등 15명의 지역 인사들이 참여하고, 독립유공자 최한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5 ․ 18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 수습대책위원회는 처음부터 관변이라는 한계가 존재했다.

수습위원들이 토론을 거듭한 끝에 계엄 당국에 제시할 7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결정했다.

* 계엄군의 과잉진압 인정.

* 구속학생 및 민주인사 연행자 석방.

* 시민의 인명과 재산 피해 보상.

* 발포명령 책임자 처벌과 국가 책임자의 사과.

* 사망자 장례식은 시민장으로 치를 것.

* 수습 후 시민, 학생들에게 보복하지 말 것.

*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기 자진 회수 반납 무장해제.

전남대 명노근, 송기숙 교수가 휴대용 메가폰으로 수십 명의 대학생을 모았다. 현장에서 모여든 학생들과 토론한 결과 학생수습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일반 수습위원회는 주로 계엄 당국과 협상하거나 시민을 설득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학생 수습위원회는 청소, 질서유지 등 대민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계엄 당국과의 첫 협상

수습위원 중 선발된 협상대표 8명이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가 계엄군 측과 협상을 시작했다. 수습위원들은 오전에 도청에서 머리를 맞대고 정리한 7개 항의 요구조건을 하나씩 차례로 설명하였다.

조비오 신부는 “항쟁 기간 동안 위 7가지 요구사항 중 약속이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수습대책위가 마련한 시민들의 요구는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협상 결과 얻어진 것이라곤 선별 석방외에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협상보고대회

수습대책위원회는 전교사의 전남북계엄분소 방문 협의 결과에 대하여 ‘협상보고대회’를 개최했다. 시민들은 협상 결과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협상 보고대회는 갑자기 수습위원들에 대한 성토장으로 변했다. 협상 보고대회는 추모대회로 변한 채 끝나고 말았다.

 

모여든 활동가들

관변 인사들이 주도하는 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주의적인 한계가 드러난 자리였다.

계엄군의 퇴각과 함께 마비돼버린 기존 행정조직을 대신할 새로운 조직도 시급했다. 시민들은 이런 비상시국을 맞아 자신의 운명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원했다.

신군부가 집권야욕을 포기하거나 광주시민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지 않는 한 이런 엄청난 상황을 슬기롭게 수습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엄중한 비상시국을 미약하나마 감당해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집단은 1970년대 군사독재에 저항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민주화운동가들, 그리고 재야 정치권 인사들이었다.

 

무기 회수를 둘러싼 분열 조짐

무기 회수를 둘러싸고 시민들 내부에서 분열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뭉쳐진 역량이 분산될 조짐을 보였다.

첫날 수습위원회는 시민군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는 그대로 둔 채 우선 길가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무기와 시민들이 자진해서 도청이나 공원에 맡겨두고 간 무기만 수거했다.

 

암매장 시신들

소나무로 뒤덮인 야트막한 교내 뒷동산에서 솔잎이 유난히 많이 쌓여 있는 곳이 그의 눈에 띄어 발로 밟아보니 쑥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등학생 시신 1구가 나왔다.

희생자의 시신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광주 주변 야산에서 발견된 시신들이 많았는데, 31사단 뒤 오치의 야산에 희생자가 묻힌 근처에는 계엄군이 다른 시신도 묻으려다가 시간이 부족했던지 파다가 만 구덩이도 보였다.

 

지역방위대

광주공원 광장은 무장시민군의 중심무대였다. 시민군의 지역방위 활동 장소는 백운동 철길과 화정동 공업단지 입구, 동운동 고속도로 진입로, 서방 삼거리, 산수동, 학운동 배고픈다리 등이었다. 각 장소마다 1개 중대 병력 정도의 무장청년들이 배치되었다.

지역방위대로는 가장 먼저 조직된 곳이 학운동 ‘배고픈다리’였다.

 

군부 강경라인의 등장

전교사령관 윤흥정 중장이 내각 개편과 함께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소준열 소장이 후임 전교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신군부는 소준열 소장을 전교사령관에 앉힘으로써 강경진압체제를 확립했다.

 

미국의 진압 동의

토머스 로스 미 국방성 대변인은 존 위컴 주한유엔군 및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자신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한국군을 시위 군중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로스 대변인은 지금까지 북한군이 한국의 현 상황을 이용하려 한다는 움직임이나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위협도 없는데 순전히 국내의 시위 진압을 위해 정규군을 투입하는 데 동의한 것이다.

 

반미 감정이라는 후유증을 예견하다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의 상관들에게 군사적 해결이 예상된다고 지적하면서, “군사적 해결책이 앞으로 미국을 곤란하게 만들 것 같다”고 보고했다. 미국의 통제 아래 있는 20사단의 이동을 승인할 경우 앞으로 미국의 책임 문제가 발생할 것을 521일 첫 번째 보고서에서 이미 예견했다.

두 번째 보고서(21)는 더욱 구체적이다. “군대는 아마도 강력한 무력을 사용해 질서를 회복할 것이지만, 이미 손실은 향후 몇 년간 지속될 정도로 큰 상처가 발생. 왜 이 남쪽 도시에서 심각한 폭동이 일어났으며,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부의 역량이 큰 손실을 겪었는가?

 

세 번째 보고서(21)광주시민 15만 명이상이 시위에 참가하고 있으며, 12 ․ 12사태를 주도한 장군들은 무척 당황하고 있다”고 전했다. “위컴 장군은 국내 비상사태에 동의하면서 북괴 침투에 대비하기 위해 데프콘 3’와 함께 몇 가지 비상조치를 취했다”고 보고했다.

글라이스틴은 이때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의 군사반란에 대한 미국의 협조가 항쟁 이후 반미 감정확산으로 이어질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쟁이 진행되는 동안 광주에 머물면서 공수부대의 진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아놀드 피터슨 목사의 시각은 데이비드 밀러(글라이스틴) 공사와 달랐다. 피터슨은 주위 사람들이 위험하다며 광주에서 빠져나가라고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광주를 떠나지 않고 현장을 지켜보았고,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상황과 헬리콥터의 기총사격을 증언했다.

 

피터슨 목사는 항쟁기간 중 거의 매일 광주 시내에 나가 홀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하였지만 자신이 미국인이라고 해서 어느 누구로부터도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만난 대부분의 광주시민들은 외국인들을 더 반기며 도와주려고 했다고 자신의 책에다 적었다.

 

 

 

 

 

9. 해방기간 Ⅱ (p.305~321)

 

523일 금요일 항쟁 6일째

 

도청으로! 도청으로!

외곽지대에서는 밤새도록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다. 계엄군은 외곽을 완전히 포위한 채 밤중 내내 봉쇄작전을 펼쳤다. 23일 아침 광주 시내는 여전히 해방감과 승리감으로 고조된 분위기였다.

도청에서는 아침부터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가족들이 접수한 행방불명자 명단을 여러 병원의 입원 환자와 사망자 명단과 대조하는 일이 시작됐다.

도청에 안치되어 있는 사망자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씩 신분증을 대조한 후 시신을 보여줬다.

 

장례 담당 김종배는 관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자 학생수습위원장이 보증하는 확인서를 가지고 시내 곳곳의 장의사를 돌아다녔다.

 

두 번째 협상

23일 확대수스위원회는 계엄사에 요구할 8개 조건을 다시 확정했다.

- 계엄군, 공수부대의 지나친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 연행자를 석방하라.

- 계엄군의 시가지 투입을 금지하라.

- 시민, 학생 처벌 및 보복 엄금하라.

- 정부 책임하에 사망자, 부상자의 피해 보상하라.

- 방송 재개 및 사실 보도를 촉구한다.

- 자극적인 어휘 사용을 금지하라.

- 시외 통로를 열어라.

 

학생수습위 내부에서는 현안에 대해 토론한 결과 대부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무기 반납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팽팽한 대립을 보였다.

수습위원들은 우리에게 시민을 지휘 통솔할 권한이나 힘은 없다. 그러나 계엄사측에서 확실하게 다른 요구사항을 보장만 해준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적극 무기 회수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계엄 당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무조건적인 무기 반납을 요구했다. 수습위원들은 거듭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수습위원들은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시민들을 설득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무기를 내줄 것인가

조비오 신부 등 계엄분소에 협상대표로 갔던 수습위원들 일부가 석방자 34명을 데리고 돌아오자 수습위원회에서는 무기 반납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김창길 등 무조건 무기 반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계엄사가 실제로 구속된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우리가 무기만 모두 회수하여 반납한다면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고, 만약 이 상태에서 더 이상 계엄군과 대결했다가는 엄청난 피를 흘릴 것이다. 서둘러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고 더욱 강하게 주장했다.

김종배 등 조건부 무기 반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무조건 무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광주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다. 뿐만 아니라 시민군이 반납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주장하는 정부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구속되어 있는 학생과 시민들이 당장 석방되어야 하며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정당하게 보상되고, 사망자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치러야 한다라고 말했다.

 

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수습대책위원회와 별도로 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하던 청년 몇 사람은 시민군을 조직화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23일 오전 일찍 녹두서점에는 김영철, 윤상원, 박효선, 김태종, 정유아, 이윤정, 임영희, 윤기현 등 시민사회단체 인사들과 운동권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전날 협상보고대회에서 시민들의 요구와 분노가 얼마나 강력한 수준인지 드러났다.

오후 3시에 제1차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윤상원은 도청에 들어가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을 만나 시민궐기대회와 가두방송, 홍보전단 제작 등 홍보활동을 맡겠다고 협의한 후 도청을 나왔다.

가장 급하게 서둘러야 할 일은 시민들에게 오후 3시로 예정된 도청 앞 광장 행사 자체를 알리는 일이었다.

오후 3시까지 15만명에 이를 만큼 시민들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23일 궐기대회는 격식을 갖추어 진행되었다.

시민들이 흩어질 무렵, 헬리콥터가 시내 전역에 계엄사의 전단을 뿌렸다. 전단에는 경고문이라는 붉은 글씨와 함께 소요는 고정간첩, 불순분자, 깡패의 소행이고, 총기와 탄약과 폭발물을 탈취한 폭도들의 행패는 계속 가열되고 있으므로 계엄 당국은 곧 소탕하겠다.’는 계엄사령관의 엄포가 적혀 있었다. 전단을 주워 읽은 시민들은 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버리고는 그도 시원치 않았는지 발로 짓뭉개버렸다.

 

강력한 지도부가 필요하다

궐기대회를 마친 다음 극단 광대와 송백회, 들불야학 등의 운동권 청년 학생들은 YWCA에 모여 평가회를 가졌다.

YWCA소심당 강당에는 청년 학생, 극단 광대 단원, 송백회 회원, 들불야학 학생과 강학 등 40여명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18일 항쟁이 발발한 이래 활동가들이 그렇게 많이 모이기는 처음이었다.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도 계엄 당국과의 대화에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부가 필요했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조기에 수습해야

23일 오전 9시경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정보, 작전, 군수 및 전략기획 등 참모부장, 계엄사 참모장, 진종채 2군사령관 등이 참석하여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을 본격 논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실세들은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하여 저항하고 있는 시민과 학생들을 조속히 진압해야 한다.”고 지침을 내린 상태였고, 이 지침에 따라 이희성 사령관이 직접 재진입작전을 검토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희성 사령관은 작전 개시는 시민들의 무기 반납, 시민과 폭도의 분리, 진압작전부대 지휘관의 준비 등에 필요한 시간 등을 감안하여 ‘525일 새벽 2시 이후명에 의하여 하되, 작전계획과 작전 개시 시각은 현지 지휘관인 전교사령관에게 맡기도록 결정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방침은 확고했다. 시민들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시민들의 희생을 전제로 조속한 유혈진압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