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에세이필사

3. 한 여름 밤의 라디오(별밤지기의 멘트를 들으면서) <잊기좋은이름, 김애란>

물빛향기 2020. 5. 5. 21:36

에세이 필사 3차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한 여름 밤의 라디오
   초여름 저녁 개수대 앞에 난 책받침만 한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총총 반짝였다. 다닥다닥 붙은 현대식 가옥 사이로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십자가도 한둘 솟은 덕에 네모난 창틀 속 풍경은 그 자체로 고장 난 멜로디카드처럼 보였다. 하늘은 노랑이었다가 주황에서 보라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검푸르게 변했다. 나는 멀리 산 아래 밀집한 온갖 형태의 집들을 바라봤다. 각 건물은 반듯한 듯 삐뚤빼뚤한 윤곽을 드러냈는데 그 경계가 또렷해 가위로 오리면 하늘만 따로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세미를 쥔 내 양손 사이로 보글보글 합성세제 방울이 풍성하게 일어났다. 더불어 진행자가 읽어주는 내 소설과 오래전 내가 경험한 일들이 가슴팍에 부딪혀 포말을 만들어냈다. 어느 새 나는 수돗물 소리에 진행자의 목소리가 뭉개지지 않게 수압을 약하게 줄여놓고 있었다. 수압이 약하면 설거지 시간이 배로 걸리지만 진행자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다. 그리고 소설 속 젊고 가난한 연인이 종로에서 영등포를 거쳐 마침내 구로에 다다랐을 즈음, 주로 이주 노동자들이 머무는 누추한 여인숙 내부를 여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두리번거린 순간 설거지를 마쳤다.               -  잊기좋은이름 (김애란, p.38)

■ 문장 분석

- 팟캐스트에서 자신의 단편 「성탄특선」을 듣고 쓴 부분입니다.(2012)
- ‘다닥다닥 붙은 현대식 가옥 사이로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십자가도 한둘 솟은 덕에 네모난 창틀 속 풍경은 그 자체로 고장 난 멜로디카드처럼 보였다.’ 설거지하면서 본 바깥 풍경 묘사입니다.
- ‘고장 난 멜로디카드’는 단편 제목과도 어울리는 단어를 선택했네요.
- ‘하늘은 노랑이었다가 주황에서 보라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검푸르게 변했다.’ 초여름 저녁이니까 노을 풍경을 묘사했습니다.
- 노랑-주황-보라-검푸르게~ 색상의 변화를 변화와 당시 시간을 알려주는 문장입니다.
- ‘각 건물은 반듯한 듯 삐뚤빼뚤한 윤곽을 드러냈는데 그 경계가 또렷해 가위로 오리면 하늘만 따로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상상력을 보게 만드는 문장입니다.
- ‘수세미를 쥔 내 양손 사이로 보글보글 합성세제 방울이 풍성하게 일어났다.’ 현상을 남다르게 표현하는 힘이 있어요. 이런 문장들을 잘 곱씹어 보면 좋겠습니다.
- ‘더불어 진행자가 읽어주는 내 소설과 오래전 내가 경험한 일들이 가슴팍에 부딪혀 포말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쓴 소설이 라디오에서 나오고, 그걸 들으며 경험한 일을 떠올리는 상황이 소설 같습니다.
- ‘포말’(물거품)이란 어휘도 인상적입니다.

 

모스크마 톨스토이 생가 정원에서 담소를 나누는 윤부한 선생과 김연수

단상)
별밤지기의 멘트를 들으면서

 

    <잊기좋은이름> 에세이 2일차에 쓴 물탱크 방에서의 내용처럼, 옥상 물탱크 방에서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을 들으면서 옥상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희뿌옇다.

    가깝게는 네온사인이 불빛이 번쩍이고, 높은 건물에는 불이 커져있다. 그 옆에 주택가에서는 시끌벅적 이야기 나누는 소리도 들리므로 해서, 라디오의 별밤지기 목소리가 안 들려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방은 후덥지근하고, 밖은 그래도 조금 시원하다. 그래서 방문 가까이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어느 한 곳을 바라보니,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저 많은 불빛 중에 내가 둥지를 틀고 있을 집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