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에세이필사

펄펄 끓는 얼음에 이르기 위한 5단계 <소설가의 일, 김연수>

물빛향기 2020. 6. 8. 22:31

♣ 8일차 에세이 필사하기 - '펄펄 끓는 얼음에 이르기 위한 5단계' <소설가의 일, 김연수>

 

♣ 필사 본문

 

펄펄 끓는 얼음에 이르기 위한 5단계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컴퓨터가 있다면 거기에 쓰고, 노트라면 노트에 쓰고, 냅킨밖에 없다면 냅킨에다 쓰고, 흙바닥뿐이라면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집어서 흙바닥에 쓰고, 우주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다면, 머릿속에다 문장을 쓰자. 머릿속에 쓰든 흙바닥에 쓰든, 자신이 소설을 쓴 것인지 그냥 생각만 한 것인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한심한 내용일지라도 글자수를 헤아릴 수 있다면 소설을 쓴 것이고, 제아무리 멋진 이야기라도 헤아를 글자가 없다면 소설을 쓴 게 아니다.
헤아릴 글자가 하나라도 있다면, 이제 그 글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헤아릴 수 있는 글자를 하나라도 쓴다’라고 썼다면, 이제 그 문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글자’를 ‘문자’나 ‘자모’로 바꾸면 어떨지, ‘헤아릴 수 있는’을 ‘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혹은 ‘눈에 보이는’ 혹은 ‘손으로 쓴’으로 바꾸면 어떨지. 아니면 아예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어떨지. 한 글자라도 쓰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을 쓰겠다면 생각하지 말자. 쓰고 나서 생각하자.     - p.199 <소설가의 일, 김연수>

 ■ 문장 분석

- 아무리 구상이 좋고, 멋진 소재가 있어도 문장은 쓰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합니다.
-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지 말자라며 단호한 어조로 강조합니다. 
-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며 컴퓨터/ 노트/ 냅킨/ 흙바닥에라도 쓰라고 주문하네요.
- ‘심한 내용일지라도 글자수를 헤아릴 수 있다면 소설을 쓴 것이고, 제아무리 멋진 이야기라도 헤아를 글자가 없다면 소설을 쓴 게 아니다.’ 헤아릴 글자수는 예를 들면 원고지 30매, 천자~ 등 이렇게 셀 수 있을 때 소설을 쓴 것이라고 하네요.
- 퇴고과정의 중요성도 언급합니다. 
- ‘헤아릴 수 있는 글자를 하나라도 쓴다’라고 썼다면 여기서 글자=문자=자모로 바꿀지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 헤아릴 수 있는=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손으로 쓴 등 여러 어휘를 넣어 퇴고해보라고 하네요.
- ‘그러니 소설을 쓰겠다면 생각하지 말자. 쓰고 나서 생각하자.’ 생각보다 쓰는 게 중요하다고 계속 강조합니다.
- 진짜 뭐라도 고쳐야 할 거 같습니다.  
- 단톡방에 올린 단상 글이 있으시면 새로 쓰지 마시고 퇴고해서 다시 올려보셔도 좋겠습니다.  
- 단상글이 없으신 샘들은 이번 기회에 써보시면 좋겠네요. 

 

♣ 필사본

 

 

♣ 5일차 미션 작문하기 수정 작업 후
◈ 갑자기 찾은 부모님 집

 

   아들은 살짝 손잡이를 돌린 뒤 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노부부는 식탁(그릇들이 줄 맞춰 길게 놓여 있었다)을 바라보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정돈하시는, 노부부는 언제나 이런 것에 신경을 쓰고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불렀다.

   “어머나, 간 떨어지겠네!”

   아들은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던지! 아들은 부모님이 놀라 의자 아래로,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렇게까지 놀라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들은 회사 일로 지나는 길에 연락도 없이 찾았다.

   “세상에 어쩐 일로 왔니?”

   노부부는 놀라 함께 외쳤다.

   “나예요, 아버지, 어머니.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지나는 길에 들렸었요.”

   “그래, 어서 와.”

   석연찮게 아들을 맞이하는 노부부.


◈ 보너스

 

♠ 보너스 - 1

   한국어 문장에서는 제일 먼저 서술어 부분을 손본다는 말을 하기 위해 너무나 멀리 돌아왔다. 한국어는 서술어 부분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게 특징인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술을 마신다’라고 할 때, ‘나는’과 ‘술을’은 크게 바뀌지 않지만 (여컨대 기껏해야 ‘본인은’과 ‘필자는’, ‘참이슬을’과 ‘글렌피딕 12년 산을’ 등으로), ‘마신다’ 부분은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마셨다, 마실 것이다, 마시고 싶다, 마셨으면 한다, 마시는 것이다, 마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셔주었으면 하고 바라 마지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등등등. 그 리스트는 끝도 없다. 이건 교착어 특성인데,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묻는 전짓불 앞에서는 참으로 유용한 특성이기도 하다.(p.209)

 

♠ 보너스 - 2

   뒤집어서 말하면, 정확한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한국어의 이런 특성을 최대한 줄여야만 한다. 그래서 문장을 손볼 때는 서술어 부분을 최대한 줄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명사처럼 쓴 동사를 정리한다. 예를 들면 ‘하다’를 독립적으로 쓰지 않는 식이다. 대개 문장에서는 위의 ‘생각을 하다’처럼 쓰여지느데, 결국 이때 우리는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한다’, ‘~을 하다’는 모두 ‘~ 하다’고 바꾼다.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녀에게 선물을 했던 것이다’라는 문장에는 서술어 부분이 명사처럼 보이는 게 ‘선물’과 ‘것’ 두 개나 있다. ‘선물’이 진짜 동사고 ‘하다’는 가짜다. 당연히 이 문장은 ‘나는 그녀에게 선물했다’로 줄여 진짜 동사를 드러내야 한다. 
가능하면 동사(혹은 형용사)와 시제만 남게 서술어 부분은 단순하게 만든다. ‘선물하였다’도, ‘선물해봤다’도, ‘선물해줬다’도 모두 ‘선물했다’로 줄인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술어 부분을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면 도대체 내가 무엇을 쓴 것인지 조금씩 명확해진다. 그러면서 글의 내용이 빈약해진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복잡한 서술어 구조 때문에 가려졌던 빈약한 구조가 드러나면서, 내가 무엇을 쓰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 (p.211)

나는 그녀에게 선물을 했던 것이다.(X)
나는 그녀에게 선물했다. (O)

 

♠ 보너스 - 3

   소설을 쓸 때, 생각하지 말자고 한 것은, 생각을 생각할 생각도 하지 말자고 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소설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질 수 있는 단어들로 문장을 쓰는 일이다.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 필요하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뭐가 보이고 들리고 맛이 나고 냄새가 나고 만져지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게 소설 문장의 시작이라면, 끝은 그렇게 알아낸 감각적 묘사를 유사한, 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다른 감각적 표현으로 치환하는 일이다. 이 치환을 좀 더 능숙하게 하려면 평소에 감각하는 연습을 많이 해서 더 많은 감각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지금 뭐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지, 어떤 냄새가 나고 어떤 맛이 나는지, 자신에게 묻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라도 쓸 수 있다면, 그걸 문장으로 쓰자. 자기가 지금 뭘 보고 듣고 만지고, 또 어떤 냄새와 어떤 맛이 나는지. 언젠가 나는 삼십 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사실상 소설가의 일은 이게 전부다.(p.217)

 

♠ 보너스 - 4

   삼십 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쓰지 말고, 무엇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마시고,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세요. 다시 한번 더 걷고, 먹고, 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감각적인 것들 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이상 강의 끝. (p.218)